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울진 왕피천은어길

설리숲 2024. 5. 17. 20:12

 

은어라면 섬진강이지만 울진 왕피천도 은어 서식지다.

은어를 보지는 못하였다.

나는 은어를 보러 간 게 아니니 상관없다.

 

왕피천이 지나는 구산리 구간의 천변에 이색 트레킹 길이 있다고 하여 궁금했다.

 

왕피천은어길.

 

또는 '봇도랑길'이라는 이름이다. 봇도랑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물길이다.

천변에 시멘트로 봇도랑 형태의 길을 만들었다.

그 흔한 나무데크길을 지양하려는 발상인 것 같다.

 

 

하안단구처럼 수려한 경관은 아니지만 아직도 원시 생태로 남아 있는 보배로운 하천이다.

이곳에 관광객을 끌어들이려 뻘짓을 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홍보에 혹해서 다녀온 사람이니 비난할 처지는 아니다.

 

 

 

 

 

 

 

 

 

 

 

고요하고 한적한 풍경이다. 곳곳에 핀 야생화, 서덜과 모래톱, 웅숭 깊은 녹색 소와 웅덩이들. 그리고 유유히 수면을 차고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다가 무시로 만나게 되는 여울 근처에 다다르면 귀가 멍하게 요란한 물소리.

강안은 사뭇 깎아지른 단애가 이어져 있다.

태초에 나 홀로 생겨나서 버정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동안 직립원인이 되어 본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멘트봇도랑과  보호난간만 아니면 금상첨화지만

그게 아니라면 쉽게 들어가지는 못할 터.

 

 

 

 

 

 

 

 

 

 

 

 

 

 

 

 

 

 

 

 

 

 

 

 

 

 

 

 

 

 

 

 

 

 

 

 

 

여기까지는 이곳의 풍경을 예찬했지만 사실은 공포의 길이다.

죽음의 길이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바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곳을 걷다가 언제 깔려 죽을지 모른다.

 

 

시멘트로 공사한 봇도랑이 무너져 사람이 밟고 올라서면 그대로 참화를 당할 것 같다.

 

몇 군데는 시멘트봇도랑 대신 나무데크로 놓았는데 이 지경이다. 

성인 세 명도 지탱할까 싶은 저 가냘픈 쇠다리라니. 이미 돌덩이가 무너져 내려 구부러지고 허공에 들려 있다.

 

 

봇도랑은 만들어 놓기만 했지 이후의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아 물 빠지는 구멍이 없다.

비가 오면 그대로 무릎까지 차게 돼 있다.

 

 

날림공사는 차치하고 애초에 사람이 들어오면 안되는 곳이었다.

수시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절벽 밑에 트레킹 길이라니!

사진으로 가끔 보는 중국 공포의 절벽 잔도보다 더 끔찍한 길이다.

 

이곳을 보고 돌아나오면서 곽하신의 단편소설 <실락원>을 생각했다.

 

 

 

 

 


             나스카 : Montezu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