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를 가려면 전라선 기차를 탄다.
전에는 용산에서 밤 열차를 타면 새벽에 내려 일찍부터 여행을 시작했지만
이젠 밤기차가 없어져서 첫차를 탄다 해도 느지막한 아침나절이다.
‘일일생활권’이던 교통문화가 오히려 퇴보했다.
지구를 세 바퀴 반을 돌았다는 한비야의 일화.
어느 곳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 인사하면서 어디서 왔냐고 하니 임실에서 왔다고 하더란다.
임실? 임실이 어디지?
그때 몹시 부끄러웠다고 한다. 세계를 많이 돌아다녔다고 유명해지고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정작 내 나라의 임실을 모르면서 뻐기고 다녔다는 자괴감과 부끄러움.
그래서 외국 아닌 국토종단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무궁화열차를 타고 와서 임실 오수역에 내렸다.
내가 내린 오수역은 신역(新驛)이라 정감이 없고
한 20분 면내로 걸어 들어가면 옛 오수역이 있다.
옛 역이라지만 이것도 옛것은 아니다. 원래 것은 6·25 때 불타고 이 역사는 그 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예스럽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은, 멋대가리 하나 없는 건물이다.
전라선을 타고 다닐 때 숱하게 이 역을 지났을 테지만 오수에는 한번도 내려본 적이 없어 이 역사의 존재는 이번에 비로소 느꼈다.
그런데 이 폐역마저 기차를 손절하고 이제 애견방문자센터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수.
개의 고장이다.
옛날에 주인이 잠을 자던 풀밭에 불이나 위험해지자 물에 뛰어들어 몸에 물을 묻혀가며 주인을 구하고는 탈진하여 죽었다는 충견의 고장이란다.
일견 그럴 듯도 하지만 세상에!
개를 선양하는 곳이 또 있을까. 개가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니고, 실상 애국충정의 지사들도 많고 많을진대 사람보다 개를 숭앙하여 신도비를 세우고.
면내 보이는 곳마다 개판이다.
담장마다 개 벽화, 의견교, 의견공원, 의견관광지.
해마다 의견문화제를 열고,
진위가 확실하지 않은 구전설화에 오수면의 모든 행정력이 집중된 느낌이다.
심지어 삼일운동기념공원엔 의견비와 개의 동상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다시 오수역.
폐역된 지 오래인데 우편물들은 어디서 보내오는 건지.
이번 나의 주 목적지는 남원 서도역이다. 그리 멀지 않으니 걷기로 한다.
하긴 하루에 몇 번 없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걷는 게 빠르다.
오수를 떠나 서도역으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우리네 농촌풍경이다.
모내기가 한창이다. 유년시절, 모내기 하는 날의 그 흥성했던 시절로 달음박질한다.
써레질을 하는 무논엔 땅강아지가 득실거리고 그것들을 먹으려고 제비들이 어지러이 날던 정경.
수면엔 징거미와 소금쟁이가 미끄럼을 탔다.
온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줄을 지어서는 모를 심고 못줄을 넘기며 목청껏 내지르던 못소리.
논둑에들 앉아 엄마와 누나가 내온 제누리 기승밥을 먹던 정경들. 사람들은 그날이 가장 잘 먹는 날이기도 했다.
어둠이 내리면 개구리소리로 온 촌동리가 시끄럽던 초여름의 그 시절.
지금은 이앙기가 다 하고 있으니 어린시절의 그 흥성했던 마을잔치 분위기도 사라졌다.
두 시간 남짓 걸어 서도역에 도착했다.
서도역도 폐역이다. 기차는 지나가지만 역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예쁜 풍경의 서도역은 이미테이션이다.
옛 서도역 건너편에 관광을 위한 테마역으로 조성했다.
사진이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예쁘긴 하지만 정감은 없는 어딘가 허전한 감성.
이곳은 소설 <혼불>의 배경지다.
작가 최명희는 전주 출생이지만 서도역을 중심으로 한 이 마을이 혼불의 고장이 되었다. 남원의 일종의 랜드마크인 셈이다.
지근거리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나는 <혼불>을 가장 열심히 정독했었다. 그때 노봉 인월 운봉 서도역 등을 막연하게 동경했었다.
오월의 해는 어찌나 긴지.
혼불문학관 정원과 담장 밖 청호저수지를 여러 번 들락거렸는데도 해는 여전히 노적봉 위에 있다.
다시 서도역으로 나온다.
어디로 갈까. 마땅히 갈 데는 없다.
남원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오려면 꽤나 기다려야 하니 하릴없이 철로 침목 위를 어정거렸다.
예전엔 생각 없이 부르던 노래였는데
얼마 전에 문득 가사를 음미하다 보니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는 매우 슬픈 노래다.
희미한 어둠을 뚫고 떠나는 새벽기차는
허물어진 내 마음을 함께 실었네
낯설은 거리에 내려 또다시 외로워지는 알 수 없는 내 마음이여
아 그래서 마음이 허물어졌구나!
이것 말고도 새롭게 디시 다가오는 노래들이 한두 곡이 아니다. 이젠 좀 철이 드는 건지.
이제는 새벽기차도 옛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쓸쓸한 나그네의 객수도 없다.
나는 기차와 함께 여수(旅愁)를 느끼고 싶어 떠나오지만 세상은 그런 눈곱만큼의 허영도 누리지 못하게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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