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역 플랫폼에 내리니 짙게 땅거미가 내려와 앉았다. 그래도 어른어른 사물은 눈에 들어왔다.
트랩을 건너 역광장으로 나오니 그 잠깐 사이에 완벽하게 어두워졌다.
겨울 끝이지만 어둠 내린 역광장은 제법 쌀쌀했다. 철길 너머는 바로 낙동강이다. 강에서 넘어오는 바람이 가세해 을씨년스러운 저녁이었다.
원동역에서 내린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직 일곱 시가 안된 시각이지만 어둠에 쌓인 거리는 적막했다.
시골은 일곱 시가 되면 사람들이 다들 제집으로 들어가 어둠과 고요함 일색인데,
도시는 반대로 그때부터 사람들이 기어(?) 나오며 휘황해진다.
그래서 즐비하게 많은 상점들이 죄다 문을 닫고 어둠이다.
저녁을 먹어야 했다.
이곳엔 편의점도 없어 밥 한 술 못 먹으면 이튿날까지 굶을 수밖에 없다.
불현듯 불안해졌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먹는 일이 이렇게도 절박할 수가 있다.
텅빈 거리를 애타게 불빛을 찾다가 보니 불 켜진 짜장면집 하나가 저만치 보인다.
아, 먹을 수 있다!.
혹 금방이라도 문 닫고 불을 끌까 냅다 달려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밥 좀 주세요,
뭐라도 좀 주세요... 속으로 애원하며 안도한다.
이튿날이다.
과연 간밤이 제법 추웠는지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서리보다도 이미 들판을 파랗게 뒤덮은 쑥들이 경이롭다.
이런! 봄이었구나.
날이 밝으며 보니 원동마을은 이미 봄의 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노란 영춘화와 산수유가 만개해 있고 수양버들도 이미 파랗게 물이 올라 있다.
집을 떠나올 때 충주의 산기슭엔 여전히 희끗희끗 눈 쌓인 풍경이더니 시방 남쪽 이 지방은 어느 나라인고.
마을 곳곳마다 매화가 절정이었다. 실은 이 매화를 보러 온 참이었다.
올해는 더 빨리 개화했다.
지구 온난화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아열대기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징조다.
내년에는 또...
매화마을로 유명한 이곳 원동에선 열흘 후에 매화축제가 예정돼 있는데 꽃이 이리도 빨리 피어 버렸으니 정작 그때는 매화가 없을 것 같다.
사진으로만 보던 동박새를 난생 처음 직접 보았다.
내가 낳은 듯 심쿵했던 순간.
어김없이 카메라 든 언니 오빠들이 진을 치고 있다.
흐드러진 매화 옆으로 달리는 기차를 찍으려는 기다림이다.
기차는 뻔찔나게 드나들어 긴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나도 틈을 비집고 서서 몇 커트 담아 본다.
매화와 기차와 강이 있는 원동마을의 목하 풍경이다.
평일인데도 인파가 많이 밀려들었다. 주말이면 대체 어느 정도로 벅적거릴까를 가늠해 보며 남의 일이지만 오지랖을 펼쳐 쓸데없는 걱정도 해 본다.
식당은 많은데 거개가 미나리삼겹살집이다. 미나리는 이 근동지역의 특산물로 이맘때쯤 한고등으로 쏟아져 나온다.
홀로 여행자가 삼겹살을 먹기는 거시기하니 내가 먹을 수 있는 밥집이 없다.
낮이 되었어도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다니. 이런 곳은 좋은 여행지가 아니다!
혼자 투덜거리며 애꿎은 원동을 비방한다.
아침엔 싸늘하더니 카페 테라스에 쏟아지는 오후 햇살이 따가워 이젠 그늘이 그리울까를 생각한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커피를 마신다. 주위 곳곳에 가득한 매실나무로 인해 그 향이 진동하니 커피 맛이 영 시틋했다.
이제 이곳으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봄은 북으로 내달릴 것이다.
레일처럼.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훌쩍 다녀갈 수 있게 된 이 소소한 행복이 스스로 대견한 날들이다.
드뷔시 : 아마빛 머리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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