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봉정암 가을 유람기

설리숲 2023. 11. 14. 10:29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인파가 밀려들 테니 남보다 먼저 도착하려고 한밤중에 일어나 밤을 찢어 설악산에 도착했다. 6시쯤이었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셔틀버스 첫 차가 7시에 출발한다는 걸 알고 있는 터였다.

아직 날은 깜깜한데 백담사 입구는 이미 장사진이었다. 셔틀버스를 타려고 늘어선 줄이 거짓말 조금 보태 십리였다.

7시에 첫 운행을 한다는 버스도 새벽부터 부지런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잠깐의 간격도 없이 연달아 버스는 대는데도 나라미 선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미 가을이 이운 설악산의 새벽은 몹시 추웠다.

거의 한 시간여 만에 긴 줄을 극복하고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평화로운 안식의 시간이었다.

 

 

백담사에 내리니 날은 환히 밝았다.

비로소 만산홍엽 설악의 가을이 아름다운 풍경 되어 내 앞에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어느 멋진 나의 가을날이 되리니.

 

 

 

 

 

 

 

 

 

 

 

과연 봉정암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고도 아름다웠다.

단풍은 지나간 가을들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은 가히 가을의 전설이다.

 

불자에겐 만행이요, 크리스천에겐 순례의길이란 성스러운 단어가 있지만 나 같은 외출가에게는 더 멋진 도보여행이란 단어가 있다.

봉정암을 찾아가는 것이니 순례이기도 하고. 가을의 산을 즐기는 것이니 등산이기도 하고 도보여행이기도 하다.

 

 

 

 

 

 

 

 

영시암까지는 아주 평안한 길이다.

영시암은 고속도로로 피자면 휴게소다. 오르는 사람 내혀가는 사람 모두 들러 다리도 쉬고 음식도 먹고 화장실도 보고.

수행하는 스님들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닐텐데 기꺼이 행자들을 위해 휴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중에 불전함에 보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돈도 안 생기는 회향.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냥 빈손으로 지나치고 온 게 지금에사 후회가 된다.

 

 

 

 

 

 

 

 

 

 

 

 

 

 

 

 

 

 

 

 

 

 

 

 

 

 

 

 

 

 

봉정암 가는 길은 험하고 힘들다.

그런데도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허위허위 오르고 또 오르는 고행의 길이다.

맨몸으로도 힘든 길을 공양미를 지고 오르는 그 힘은 과연 불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고행의 길 끝에 드디어 마지막 깔딱고개를 올라 봉정암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심심유곡에 있는 암자 봉정암.

 

중들은 참 못됐다는 생각을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게 불교의 사찰이고 승려라고 한다면 도대체 절을 왜 중생들은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못낼 이런 심산유곡에 지었느냔 말이다.

저들끼리만 모여서 염불하고 수도할 생각이었을까.

그런데도 바리바리 공양물을 싸들고 올라오는 중생들을 보고 저들은 조롱했을까 존경했을까.

 

 

 

 

 

 

 

봉정암은 불자들보다도 등산객들이 많아 항상 벅적거리는 암자다.

공양시간이라 너도나도 국수 한그릇씩 받아 들고 나와 먹는다.

 

모두들 추워 옹송거리고 앉아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수를 먹는다.

나는 그닥 시장기가 없어 그만두고 커피 한잔으로 대신한다.

 

 

 

 

싸늘한 날이었지만 허위단심 간힘을 들여 오르니 잔등에 땀이 밴다.

눈에 보이는대로 카메라에 담는다.

 

보온병에 물을 끓여 넣어 왔는데 뚜껑이 제대로 안 닫혔는지 물이 새 가방이 흥건했다.

그건 괜찮은데 카메라 렌즈에 습기가 차 안개 낀 날처럼 사진이 부옇고 흐릿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가 없어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카메라 습기는 다음 날에야 가셨다.

 

 

 

 

 

 

 

 

 

 

 

 

 

 

이젠 하산이다.

마지막으로 사리탑에 올라 삼배합장.

카메라 습기는 절정으로 짙어져 사리탑 사진에 의도하지 않은 원광이 생겼다. 이건 부처의 배려라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일부러 이런 사진을 얻기도 힘들다. 사리탑에 원광이라니!

그래도 사리탑만은 선명하게 나왔으니.

 

 

 

해전에 백담사에 닿으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바삐 길을 재촉해야 할 일도 없으면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고독할 바에야 정착지보다야 바람에 실려 걷는 게 좋다.

떠난다는 것, 관계를 끊는다는 것. 그것은 곧 책임을 벗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만들지 않는 것.

무소의 뿔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혼자서 가라.

 

 

 

 

 

 

 

영시암을 지날 때쯤엔 어느새 해가 뉘엿거린다.

가을의 오후. 정말 아름다운 길이다.

 

 

 

 

옛 백담산장.

소설에서 나는 이곳에서 여자 하나를 죽였다. 소설가는 지 꼴리는 대로 사람들을 죽여도 벌을 받지 않는 위대한 자들이다.

옛 백담산장의 모습은 없고 새로이 리모델링해서 지금은 탐방안내소로 쓰이고 있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면서 도착한 백담사엔 진기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의 기나긴 나라미.

줄은 버스 승강장부터 세심교를 건너 백담사 경내를 돌아 다시 개울 건너로 지루하게 이어졌다.

 

맨뒤에 가서 섰다. 금세 내 뒤로도 줄이 이어졌다. 오늘 안으로 못 가겠다는 농담들이 오고 간다.

어쩌랴. 진득하게 기다리면 어차피 차례는 온다.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덧 죽음이 앞에 와 있는 것이다!

냉랭한 저녁 골바람을 맞으며 기나긴 기다림 끝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세상은 이미 칠흑의 어둠이었다.

 

 

 

교훈 하나.

가을 단풍철에는 설악산은 가지 않을지어다.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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