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교통수단의 하나지만 목적지 없이 그냥 기차여행 자체를 좋아합니다.
오래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동경했습니다. 막연히 동경만 했지 막상 떠나는 걸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작금의 팬데믹은 이제 그 실행할 작심마저도 무질러 버렸습니다.
그래도 머지않아 동경이 현실 되는 날이 올 것을 희망합니다.
V-Train을 타고 왔습니다.
V는 협곡을 의미하며 우리말로 하면 ‘협곡열차’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백두대간 첩첩산협을, 그야말로 V자 같은 협곡에 기찻길이 있어요.
예전에 영암선이었던 이 철도는 태백과 인근의 탄광에서 검은 진주를 실어내며 호황을 이룰 때 참 열심히도 달렸습니다.
석탄산업의 사양으로 이 노선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사이 한국의 철도 인프라도 KTX 중심의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산업용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관광용으로 영암선이 다시 부활했습니다.
세평오지마을이라는 승부역이 관광 핫플레이스로 명성이 오르면서 분천과 승부 사이의 관광열차도 활성화한지 오랩니다.
그후 노선이 연장되어 영주에서 철암까지 옛 영암선이 오롯이 부활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관광열차입니다 특별이 목적지가 있는 기차가 아니고 백두대간의 협곡을 달린다는 그것뿐입니다. 오롯이 기차만을 즐기는 내가 동경하는 시베리아황단열차의 축소판입니다.
세련되지 못한 낡은 기차.
추운 날은 아닌데도 난방이 변변치 않아 썰렁한 객실입니다.
천정에는 구식 선풍기가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여름철에는 선풍기로 찜통을 부채질하는 것 같습니다.
계곡물은 꽁꽁 얼어 있습니다.
과연 협곡의 겨울은 이다지도 깊습니다.
물이 언 겨울철에는 정해진 코스 말고 물길로 트레킹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겨울이니 이왕이면 창밖이 하얀 설경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풀기 하나 없는 황량한 풍경도 매력적입니다. 겨울이 주는 고독한 아름다움.
달리는 기차라 사진이 선명하고 예쁘게 찍힐 리가 없습니다.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오히려 현장감이 있어서 좋아요.
객실에는 편의시설이 전혀 없습니다. 화장실도 없어 기차는 봉화나 분천, 승부역 등 화장실이 있는 역에 정차하면서 20분 이상의 시간을 기다려 줍니다. 커피도 사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죄다 내려서는 이곳저곳 배경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시베리아황단열차도 그런다지요.
이렇게 해서 석포도 지나고 철암에 당도합니다.
아, 이렇게 또 철암에 오게 되었네요. 몇 년 전 가을에 다녀와서 후기를 포스팅했더랬는데. 그때만 해도 이곳을 다시 오게 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철암은 여전합니다. 가을에도 그러더니 겨울에는 더욱 을씨년스럽고 쓸쓸합니다.
여행자로서의 풍광은 이국적인 매력을 주지만 거주하며 살기엔 너무 삭막하고 황량합니다.
역전 커피점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나오니 아까부터 흐렸던 날이 희끗하게 눈발이 날립니다. 함박눈이라도 쏟아져 돌아가는 길에서는 제대로 된 설경을 보는가 반가웠는데 눈발만 날리며 변죽만 울리다가 끝내 눈은 내리지 않습니다.
협곡은 대신 어둑신하게 감싸여 마치 밤이 일찍 온 것 같은 음산한 풍경이었습니다.
달리는 찻간에서의 사진은 별로 보아줄 것이 없지만 여행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 그런대로 추억 하나를 돌아보기에 나름 괜찮습니다.
이제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탈 날을 일구월심 기다립니다.
모스크바가 최종착지라고 합니다만 중간 이르쿠츠크에 내려 드넓은 바이칼호수를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런 여행 상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안주할 집이 없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길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집은, 꼭 돌아와야 할 구속을 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간절합니다.
이제 겨울도 다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늘 그립고 애틋합니다. 오는 새봄보다는 겨울이 그렇습니다.
로드리고 기타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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