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다.
성남 판교 아니고 서천의 판교다.
옛 장항선이 경유하던 곳으로 충청도 3대 쇠전의 하나요 세모시장, 도토리묵시장으로 유명했지만 역시 세월 따라 쇠락했다.
서천군의 인구감소와 새 장항선의 직선화로 옛 판교역은 폐역이 되었고 새 판교역은 마을에서 뚝 떨어져 홀로 생뚱맞게 서 있다.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나마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는 부스러기로 남아 있지만 자꾸만 낡아가는 이 건물들은 머지않아 짜장 부스러기 되어 풀썩 주저앉을 것이다.
판교극장.
지금도 시 아닌 군소재지에는 영화관이 없는 게 현실인데 이렇게 버젓한 극장 건물이 있었으니 과연 은성했던 판교의 옛날을 짐작할 수 있겠다.
나름의 생각이 있어 이 낡아가는 추억의 부스러기들을 그대로 놔두고 있을 테지.
대신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는 테마로 지역홍보를 하고 있다.
홍보는 하지만 특별히 꾸미거나 더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시간을 잡아둔 셈인가.
오호라, 빈지문!
참 오랜 만이다.
어릴 때 흔하게 보았던 가게 덧문이다. 저 함석판에 ‘왕대포’ ‘안주일절’ 등의 페인트 글씨가 있었지.
부지런한 점방 주인이 새벽 일찍 빈지문을 여닫는 우당탕 소리에 잠을 깨던 추억도 나에겐 있다.
추억과 더불어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고 정겨운 것은 나도 그만큼 연식이 되었다는 것이겠다.
나이가 많아지면 추억을 반추하며 산다고.
이 마을이 아니라 나의 시간도 멈추었으면 좋으련만.
마을 정취가 옛 60~70년대의 그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지금은 21세기다. 이렇게 전기차충전기도 어엿하고 지나가는 노인들도 죄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니 과거에 묻혀 사는 구닥다리 마을은 또 아니다.
보기엔 추레하지만 이 집 음식이 굉장하다.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아주 깔끔하고 정갈한데다가 내가 먹은 콩국수도 이제껏 먹어 본 중에서 가장 맛난 콩국수라 장담한다. 이 옛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맛집이다. 11시부터 3시까지 영업시간이 정해져 있다.
이 집 홍보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누가 이 글을 읽고 혹시 판교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꼭 들러서 먹어보길 추천한다.
테마처럼 ‘시간이 멈춘 마을’이고 또 나름 유명해지고 있는 중이지만 세련되거나 우아하거나 고풍스럽다거나 하는, 여느 벽화마을 따위의 볼거리를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냥 옛 부스러기를 하나도 치우지 않은 너저분한 거리다,
이 거리를 지니며 잠시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끄고 소년시절의 어느 한 때를 소환해 보는 것도 즐겁지 않겠는가.
눈을 감으면 보이는 조그만 시골마을
옛 풍경이 보이네
복작복작거리던 시장
졸졸졸졸 흐르던 하천
왁자지껄 낚시하던 남정네들
시끌벅적 모시 짜던 아낙네들
조그만 시골마을의정겨운 풍경이 보인다
- 임예지
박진영 & 선미 : When We Di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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