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배상면주가 산사원

설리숲 2021. 6. 23. 21:08

 

“술이요? 엄청 좋아하지요.”

 

술 좋아하냐고 누가 물어보면 난 그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내가 술고래인 줄 안다.

 

술,

엄청 좋아한다.

단지 많이 마시지 못할 뿐이다. 그 좋아하는 술을 기껏 두어 잔 밖에 못 마시니 원통하다.

 

 

지금은 가양주(집에서 담근 술)가 사라졌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거의가 가양주였다.

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주세법을 만들어 허용된 업자들만 술을 만들게 하고 고액의 세금을 뜯었다.

그 외는 일체 술제조 금지였다. 한국의 전통 약주의 명맥이 끊긴 연유다.

 

내 사견은 지금도 가정마다 술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이나 김치는 그 가정의 가풍과 음식맛을 가늠하는 음식이다.

김치가 집집이 다 가풍을 입은 특유의 맛이 있어 참말 풍성한 음식문화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집집마다 독특한 술을 빚는 가양주시대가 다시 왔으면 한다.

내 유년시절에 우리 집에서도 술을 담갔다. 푸석푸석한 술지개미 한 자밤 집어먹고는 그 시큼한 맛에 들려 또 두어 자밤 집어먹다가 엄마한테 지청구를 들으며 등때기를 한 대 맞던 추억들이 있었다.

 

 

 

누룩왕 배상면은 사라진 우리 약주의 전통을 살려내 이어온 술 장인이다.

 

‘나는 이 술을 만드느라 숱한 날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연구에서 연구로 이어진 날들 동안 누룩이 술이 되고 술이 인생이 되었다’

 

그가 창업한 게 백세주로 유명한 국순당이다.

국순당은 현재 그의 큰아들이 경영주로 있고 작은아들은 배상면주가를 운영하고 있다.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지간이지만 술 업계에서는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배상면주가는 포천에 있다. 술제조공장 뿐 아니라 ‘산사원’이라는 전통술박물관이 있다.

배상면주가의 최고 히트상품인 <산사춘>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보슬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배상면주가 야외정원 근처에 가니 술지개미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세월랑은 숱한 술독으로 가득하다.

어릴 때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술주전자를 사들고 오면서 그 향기에 유혹돼 입을 대고 쭉 들이켰던 추억.

우리 또래 이전 세대들은 다들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월랑에서 풍기는 술향기가 어린 날의 추억을 일깨워 준다.

 

 

여기도 주변에 금계국이 지천으로 피었다.

저 금계국이 다 지도록 질펀하게 앉아서 술만 퍼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주 한옥마을 술도가에는 이런 글귀가 있지.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하, 참 명문이다.

 

 

 

 

슬금슬금 는개 자욱한 누마루에 앉아 약주를 마시며 누군가가 뜯어주는 가야금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그럴 때 대숲을 들락거리며 지저귀는 백로들의 풍경도 곁들였으면. 부르주아적 판타지지만 가끔은 이런 호사를 누려보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가진 자들은 그것을 향유하며 미주를 마시고

없는 자들은 신세를 한탄하며 삶의 고단함을 잊고 보상 받으려 술을 마시니.

우리 모두는 술이야 술!

인생은 술이지.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옴세

 

  백년 덧시름 잊을 일

  의논코자 하노라

 

 

 

 

 

 

박물관에서는 전시된 다양한 종류의 술을 원껏 시음할 수 있다. 들어가면 직원이 고뿌(컵의 일본식 발음.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고뿌라고 하였다)부터 내준다. 원하는 술들을 마시고 나서 잔은 반환하지 않고 각자 가져간다.

 

온갖 종류의 술이 전시된 공간은 우선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탐스럽다.

아이와 함께 온 아빠가 쌍화주를 한 잔 따라 아이에게 마셔보라 건넨다.

아이는 도리질을 하다가 받아 홀짝 맛을 보고는 달콤하다 한다. 그 말에 덩달아 나도 쌍화주 한 잔 마셨더니 짜장 달다. 이런 게 이른바 충동구매다. 좀 값이 되는 쌍화주 한 병을 사들고 나왔다.

아직 개봉을 안 했는데 혼자 마시긴 아깝고 그대 누구와 더불어 이 신의 물방울을 마실까.

 

 

   시집온 지 삼년 넘어 왜 여태 소식이 없냐는

   시어머님 잔소리는 그래도 견딜만 하지만

   시아버님의 큰 기침소리는 바늘방석이지요.

   오늘은 보름달 높이 떠 있고 바람도 없이 달빛이 쏟아집니다.

   비방주 몰래 걸러

   반주전자만 채워 조촐이 서방님께 올렸어요.

   “웬 술이요?”

   “취하지는 마세요 조금 있다 자리 펴 드릴게요”

   눈치 없는 서방님도 얼굴 붉어지고,

   총총히 나와서는 뒤안 우물가로 나섭니다.

   보름달빛 흠뻑 먹고 합방하면 아들 본다는 친정 고모님의 말씀을,

   오늘은 비방주 곁들여 시험해 보렵니다

   아! 어쨌거나 달빛이 이리도 좋으니

   아들 아니라도 님 생각 납니다.

 

 

 

 

멋드러진 정자나 누각 아니라도

개구리소리 요란한 뉘집 논두렁에 나가 앉아 밤새도록 술과 놀고 싶다.

달빛 휘영한 오늘 같은 밤에는.

지천으로 흐드러진 노란 달맞이꽃 똑똑 꺾어도 보고.

꽃향기인지 술향기인지 분간도 못하게 취해서.

 

취하고 취해 까무룩 잠이 들어도 좋으련.

비록 꿈속일지언정 푸른 화관 둥싯 쓰고 동구 밖 실개천 건너 나를 보러 오는 고운 님 하나 보이면 행복하겠다.

 

깨고 나면 세상은 역시나 허랑하고 부질없을 테지만.

 

 

 

산사원은 히트상품인 ‘산사춘’에서 붙인 이름이며

담장 옆에 산사나무가 한 그루 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뛰놀 때 아이들은 가을에 빨갛게 익은 이 산사열매를 애광이라 하여 따 먹었다.

보기에도 탐스럽고 맛도 새콤달콤하니 이것을 따 먹으면서 진한 가을을 느끼곤 했다.

후에 이것이 술이 될 줄은 몰랐다.

애광은 술이 되고 술은 인생이 되었다!

 

 

 

 

 

     가인 & 민서 : 임이 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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