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나 너를 찾아 문밖을 나서곤 하지.
굳이 어렵게 찾을 것 없이 너는 늘 저만치 가까운 곳에 서 있곤 하지.
낯익은 길가에, 또는 낯선 먼 이방의 길가에.
뉘집 담장너머에, 개울물 휘돌아 나간 산모롱이 야트막한 기스락에.
사사불공이요 처처불상이라. 어디든 있는 너야 말로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너는 늘 나를 향해 웃고 있다.
나는 네가 날 보고 좋아서 웃는다고 착각하고 황홀해한다.
너는 내가 오금을 못 피게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고 나는 여름 한 철을 그 환락의 늪에 빠져 있곤 하지.
그렇다고 네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는 않는다. 나처럼 너도 나를 사랑해 주길 원하는 것 더욱 아니다.
내가 저 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저 산도 나를 좋아하길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너는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내겐 큰 의미고 행복이다.
밤부터 시작해서 오전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명옥헌으로 가는 고속도로에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러 번 폭탄처럼 내리붓곤 했다.
이 폭우를 맞고 배롱나무 여린 꽃잎들이 견딜 수 있을까. 혹 다 떨어진 건 아닐까. 만화 속의 말풍선 같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혼잣소리도 해 보고.
명옥헌의 백일홍을 그렇게 만났다.
일전. 때를 못 맞춰 너무 늦는 바람에 명옥헌 백일홍이 거의 지고 있더라는 지인의 말에 벼르고 별러 찾아왔는데 나는 제대로 때를 맞춘 것 같다.
잘생긴 사람은 여름에 더 덥다고 내가 그래서 더운가 본데.
이 염천 무더운 여름이 싫지 않은 건 청춘 같은 낭만바다와 농염하게 성숙한 백일홍이 있어서다.
말이 여린 꽃잎이지 실은 배롱나무 꽃은 강인하기 그지없다. 온갖 비바람에 이아쳐 버틴 강인함이기에 백일홍이라고 이름 붙였겠지.
평일에다가 아침나절의 많은 비, 궂은 날씨에도 명옥헌원림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젓한 데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규모가 크지 않은 정원엔 부나하게 사람들이 들고났다.
카메라 화각마다 주연배우나 엑스트라 배우처럼 관광객들이 들어가 있다.
아직은 피지 않은 봉오리부터 숲그늘에 다보록이 떨어진 꽃잎까지 바야흐로 이곳은 붉은색의 몽상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을까지 그럴 것이다.
올해는 그대를 만나러 이곳 명옥헌에 왔고
명년에는 어딜 가야 너를 볼까. 일년에 한 번만 만나는 견우직녀인 듯 나는 또 다음 해의 기약을 하며 너를 떠난다. 그러니 아쉬움보다는 새로운 설렘으로 나는 기꺼이 이별을 고한다,
그러고 보니 칠월칠석 즈음에 너는 가장 강렬하고 화려하게 피는 꽃이였구나.
너로 인해 행복한 여름날의 한때.
오늘.
실은 야네들이 진짜 백일홍이다.
목백일홍의 선연함에 취해 홀대한 것 같지만 너희들의 매력 또한 잊지 않고 있으니 섭섭해하지 마시라.
조수미 : 불인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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