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꿈이었다.
해거름이면 언제 깨졌는지 알 수 없는 켜지지 않는 보안등 아래로 어둠이 짙어지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 퇴근하는 아버지 오빠 누나가 비척거리며 지나가던,
날이 가물어 어디서 건 듯 바람만 불면 담장과 바닥의 바스락거리던 시멘트 가루가 날려 눈을 못 뜨던,
조촐한 비라도 내리면 질퍽한 웅덩이를 피해 낡은 우산을 쓰고 새벽 출근을 하던 또 그 사람들.
그들은 어서 이 골목을 떠나는 것이었다.
달동네는 그들의 꿈이 서리어 있던 우리의 둥지였다.
한때는 그 꿈들이 적으나마 아늑해 보이던 달동네들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면 꿈들마저 다 사라진 적막이 되어 있곤 했다.
떠나간 그들은 꿈을 이루었는지,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벽화로 알려진 마을들은 대개 이런 달동네다.
통영 동피랑, 동해 논골담, 여수 고소동, 서울 이화동, 부산 흰여울 등이 그렇다.
화려하게 채색하여 빈민가의 옛 기억을 씻어내고픈 애잔한 슬픔이 보인다.
청주 수암골.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려고 청주공항으로 가다 시간이 많이 남아 둘러보았다.
벽화. 언제부턴지 하나의 트렌드가 된 콘텐트다.
이곳은 여러 편의 드라마가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천안 미나릿길처럼 이곳도 점집 당집들이 산재해 있다. 소위 신빨이 잘 받는 곳인가 보다. 전에는 호황을 누렸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떠나간 꿈처럼 한적하다.
언제부터 연탄재가 사진의 피사체가 되었으며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가.
흔하디 흔한 서민들의 분신이었던 것들은 시간이 흘러 귀하고 호기심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곤 한다.
이리저리 촌로와 촌동들의 발길질에 뒤채이던 하찮은 물건들이 인사동에 나와서는 귀한 골동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곳은 또 카페들이 집중된 거리이기도 한다. 세련되고 으리으리한 대형 카페들이 곳곳에 포진해 젊은이들의 발길이 번성한 거리다.
그해 겨울,
그해 겨울은 몹시 춥고 길었다.
기나긴 전쟁으로 헐벗고 가난하여 울산 23육군병원에서 이곳 수암골로 이주하였다.
황량한 바람만 불던 불모지의 땅에 흙벽돌 한 장 한 장 찍어가며 희망을 쌓아 올렸다.
우암산 기슭 달동네
이제 여긴 나의 고향이다.
좁은 골목과 언덕을 뛰어다닐 내 아이들의 고향이다.
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언덕엔 꽃다지 민들레 애기똥풀이 꽃을 피우고 좁은 텃밭엔 어린 채소가 자라고 있다.
애기똥풀 꺾어 손톱에 노란 물 들이고 민들레 씨앗 바람에 날리면 따스한 햇살이 어린 채소밭에 내려앉는다.
늘어나는 처마 밑으로 재재재재 제비 날아드는 저녁이면 산 아래 도회지로 도널러 나가신 아버지의 그림자가 멀리 보인다.
가난이란 기억의 길,
새벽 거리 날품 팔러 나가시던 어머니 따라 비알길 골목 끝나는 낮은 담벼락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쪼그려 앉았던 그날들이 보인다.
논 몇 뙈기 팔아 쫓기듯 떠나온 고향은 보이지 않았지만
산모롱이 끼고 난 작은 길옆 묘들이 자리잡은 푸른 가난 앞에 서면
얼기설기 판잣집 지붕들이,
저녁연기 피어오르지 않는 저 산동네가,
찬 이슬일지라도 눈물짓지 말라던 낮은 담벼락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아득한,
저 길이 보인다.
정은지 : 하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