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강천사 가는 길

설리숲 2020. 11. 22. 00:42

강천사를 처음 찾았던 게 2002년 12월이었다.

공동체마을에 축복하지 못할 결혼식이 있었다. 축복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이 있었다. 감히 말리지는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다. 그들의 결혼을 부정하는 내 알량한 의사표시였다.

 

날은 왜 그리 추운지 전라도 일대는 눈 내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녹지 않고 그대로 설원이었다. 차창 밖의 설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낭만적인데 그 정취를 즐기지 못하게 마음은 얼어 있었다.

이름 모를 산협 모퉁이의 암자들을 찾아다녔다. 훗날에야 일종의 ‘암자순례’로 포장했지만 사실 당시는 왜 그러고 싸돌아다녔는지 알 수가 없다.

실은 그 며칠 전부터 정찬주의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포켓용 책을 일고 있었던 참이었다. 책에 소개된 암자들을 찾아 전라도 일대를 헤메 다녔다. 시시각각으로 그때의 소회를 적은 메모장이 있었는데 나중에 읽으려고 찾았더니 언제 없어졌는지 종적이 없다. 못내 아쉬웠다. 그 하잘것없는 낙서가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비망록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놓친 고기가 크듯이 잃어버렸으니 더 아쉬움이 짙은 것이다.

 

어쨌든 그때의 기억은 조그만 편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추운 기억만 남아 있다.

그때 우연히 들렀던 곳이 강천사였다. 목적지 없이 다니던 여행이라 문득 길가에 있던 강천사 안내 팻말을 보고 들어갔었다. 강천산 계곡이었다. 역시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사실은 암자는 아니지만 암자만큼이나 조촐하고 소담한 절이었다. 대웅전 기단 밑에 기와 몇 장을 기대어 놓았고 기왓장마다 글귀가 씌어 있었다. 한 글귀가 가슴에 와 닿아 역시 메모를 해 두었는데 노트가 없어졌으니 무슨 글귀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무튼 강천사라는 절을 그대 처음 알았고 기억나는 건 역시 눈과 추위였다. 그리고 하나더 능성 위 파란 하늘에 떠있던 둥근달이 생각난다. 대낮인데도 선명하던 낮에 나온 보름달. 지금이라면 그런 세세한 것 하나라도 사진을 찍었겠지만 그때의 기록들은 문득 생각나는 희미한 조각들이 전부다.

 

그로부터 오랜 후에 강천사를 찾았다. 그때는 우연한 맞닥뜨림이었지만 이번엔 우정 방문이었다. 단풍도 막바지고 나무들도 전부 잎을 떨구고 있는 철이라 강천사의 쓸쓸함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쓸쓸하긴커녕 강천사 가는 길은 인산인해다. 나는 강천사만 염두에 있지만 절이 속한 강천산은 군립공원으로 해마다 가을철이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단풍 명소임을 새삼 알았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2002년의 그것과는 너무너도 달랐다. 계곡 입구에는 드넓은 주차장이 있고 차들이 빼곡이 들어찼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식당 모텔 등으로 번화가가 되어 있었다. 아 상전벽해! 이렇구나.

 

단풍은 절정이 지났지만 아쉬우나마 마지막 가을을 즐기기엔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지난 주말이 가장 절정이었을 것이다. 지난주의 행락객 인파는 정말 엄청났을 것을 미루어 짐작한다.

 

눈과 추위로만 기억되는 강천사의 가을이다. 절핏 절의 규모가 더 커졌다는 느낌이다. 그때는 조촐한 암자 같았었는데.

 

이 길이 올해 마지막 가을여행이겠다.

가을은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로드 매퀸 : Long Long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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