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의 바다.
부여에서 나서 제주 사진작가가 된 김영갑, 평원에서 나서 제주 화가가 된 이중섭.
또한 서산에서 나서 제주 시인이 된 이생진.
그들에게 영감을 준 제주의 매력은 어떤 것일까.
나는 제주에서 그 어떤 모티프도 얻을 수 없었다. 다만 성산포에 탐닉한 이생진 시인의 필적을 찾아 바다 성산포를 거닐었다.
가을은 점점 깊어 가는데 바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성산포에서
아무 영감도 얻지 못한 둔감한 내가 무슨 이야기를 여기에 쓸 수 있을까.
성산포를 사랑하고 그리워한 이생진의 시 구절만 가져다 옮기면서 이번 성산포 여행기를 대신한다.
일출봉 매표는 7시부터다. 일출봉이야 해돋이 보러 가는 곳이니 새벽에 부지런을 떨어 올라가면 공짜로 들어간다.
오를 때는 아무도 없더니 정상에 오르니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입구에서 한 시간 정도 노닥거리도록 서너 명 보았더랬는데 이 사람들은 대체 언제 올라와 있었을까.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이생진시비공원에서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이를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이를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 나무에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에는
덜컹 덜컹, 세월이 흘렀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 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 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꽃이여, 동백꽃이여
지금 꽃으로 살아 있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슴이 산을 떠나면 무섭고
꽃이 나무를 떠나면 서글픈데
물이여, 너 물을 떠나면 또 무엇을 하느냐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술을 마실 때에도 바다 옆에서 마신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가로수, 코스모스, 빨간우체통, 그리고 등대.
등대도 빨간색이었으면 좋겠다.
일출봉엔 온종일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육할은 중국사람들이고 이할은 일본, 나머지 이할이 한국사람들인 듯하다. 쌸라쌸라 어지러운 이 행렬에 휩쓸려 있다 보면 내 나라가 아니라 어디 먼 이국에 여행온 것 같다.
일출봉의 바다언덕은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의 배경이 되는 그 언덕을 상상하게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날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 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 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 버린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 리스트에 하나 더 얹어야겠다.
어스름.
낮과 밤이 만나는 개와 늑대의 시간.
이 황혼녘을 좋아한다.
특히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먼 수평선의 황혼.
그리고 어둠으로 잠겨 드는 항구.
두고 온 성산포구의
그것들.
피아졸라 : Obliv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