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직지사에서

설리숲 2020. 12. 3. 20:52

 

 얼마 전,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일구거나 장작을 패거나 소설 나부랭이를 끼적이거나 하다가 더러 숲의 소리에도 귀기울이며 자연에 묻혀 자연의 일부처럼 '홀로 사는 즐거움과 의미'를 구현하는 소설가(?) 아우와 만나 직지사 경내를 거닐었다.
 그 절의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한다.
 그 짧은 말에 들어있는 깊고 넓은 의미를 여기서 되새겨 볼 여유는 없다. 그 말이 승가의 가르침이라면 굳이 그런 산 속에 그런 우람한 모습으로 그런 엄청난 재력과 노동력을 들여 웅장한 건축물이 사찰로 들어앉아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 절에 오르고 경내를 거닐고 다시 내려오면서 우리는 잔잔한 이야기들을 좀 나누었는데,
 "아우는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는 척 보면 다 알 수 있지?"
 "그 정도는 알겠는데, 소나무도 종류가 많아서 리기다소나무니 뭔 소나무니 하는 것까진 모르겠어요."
 "글 쓰는 사람은 뭐 그런 것까지 많이 알아야 폼이 나는 것 같고 글에서 적절히 써먹을 수 있으니, 참 알아야 할 것이 많지?"
 "그러게요.... 저 전나무는 사람들이 저를 전나무라고 하는지도 모를 텐데, 인간들이 그렇게 정해서 아는 체 하고, 또 좀 복잡하게 만들지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랄 때는 풀이나 나무나 꽃의 이름도 좀 알았던 것 같은데, 거의 다 잊어버렸어.... 막상 떠올리려 해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도시 생활은 도시 외적인 것은 자꾸 잊어버리게 하잖아요, 그 속에서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또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아요."
 "참 딱하지.... 욕심은 거듭 욕심을 낳고, 덧없는 발전의 미명 때문에 정신은 점점 혼미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런 면에서는 또 아우가 부럽지.... 이건, 또 무슨 나무지?"

 나는 도시에 돌아가면 또 금세 잊어버리고 말 나무들과 꽃들의 이름을 아우에게 자꾸 물었다. 글을 쓸 때 더러 등장하게 되는 꽃과 나무들의 이름만은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데, 마음으로는 꼭 글을 쓰기 위해서 이런 것들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눈에 띄는 데로 쓰다듬거나 만져보며 거듭 물었는데 아우는 일일이 대답을 해주었다.
 자연 속에서 마음으로 정이 가는 사람과 이런 류의 대화를 나누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기분이 썩 좋아지는데, 어느 결에 대화의 질이 조금 바뀌었다.
 "왜 요즘.... 글을 거의 쓰지 않는 것 같던데.... 잘 안되나?"
 "뭐, 그냥.... 별로 생각도 없어져요. 그냥 이래저래 시간이나 죽이고 있어요...."
 "남다른 재능이 있는데 그걸 제대로 발현하지 못하면 그 또한 억울한 것 아닌가?"
 "아이구, 재능이랄 게 뭐 있어요.... 그냥 재미 삼아 좀 놀았죠.... 그것도 하다보니 별 뜻이 없어지네요..."
 "결국, 그마저도 욕심이란 걸 생각하게 되니까 그렇겠지.... 욕심을 버리려 하면서 다른 쪽의 욕심을 찾는 모양이 되어버리니...."
 "예, 그런 생각도 들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그런 일들에 회의를 갖게 해요."
 "이번에도 부산까지 도보로 국토순례 갔다왔다며? 그런 힘든, 일종의 수행에서 존재의 의미나 뭔가를 또 좀 느끼지 않나? 그런 것들을 혼자만의 느낌으로 가져버리기엔 좀 아깝지"
 "예, 이번에는 14일 걸렸는데 무척 힘들었죠.... 저는 이런 것이 처음도 아니고, 그렇게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몸으로 느끼는 것일 뿐이죠. 학생들이나 커 가는 아이들에겐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이렇다 저렇다 별로 말할 건 없어요, 스스로 느껴야 하는 거니까...."
 "시기가 아닐까.... 누구나 이런저런 시기를 겪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열화같이 뭘 피워내고 싶을 때도 있고, 그냥 겨울잠처럼 가만히 침잠하고 싶을 때도 있고.... 희망과 절망이거나, 낙관과 비관이거나 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모르겠어요, 뭐, 그냥.... 어떤 것에다 무슨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도 우스운 짓 같고...."
"자연과 가까이 살다보면 자연의 무욕과 그 속의 어떤 섭리, 순환의 이치 같은 것을 좀 더 체감하고 커다란 경이 앞에 자기 존재의 덧없음을 좀 더 빨리 직접 느끼게 되겠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뒤늦게 취미로 글에 좀 가까이 하다가 보니,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의 변화를 갖게 되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의미나 생의 목적이나,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이나 그것을 좇기에 역부족인 스스로의 능력, 내가 느끼거나 알게 된 조그만 것도 어떤 방식으로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열의를 가져 보다가 그 자체가 무엇도 아닌 것 같아 실소를 짓기도 하지.... 그냥 편안히 어디에 귀일 되었으면 좋겠다 하면서 또 그 목적을 위해 지금의 일과 환경을 버리지도 못하지. 언제 어디서나 생은 어떤 방식으로든 영위되고 있는데 말이야...."
 "뭐, 별 거 있겠어요? 다, 누구나 그 자리에서의 삶도 하나의 인생이고 존중되어야지요. 저는 한 편으로 국외자를 자처한 거지요. 저는 이게 좋아요...."
 "아우를 좋게 기억하고 아우의 좋은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시게.... 또 한 차례의 바람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생각 또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내 채근하지 않고 바라볼 것일세. 찬바람이 먼저 드는 정선의 가을 한 밤을 아우와 술이나 나누고 싶구먼.... 벌레처럼 우리, 천천히 살도록 하세. 저 풀, 나무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늘이 잔뜩 내려와 있네, 가는 비는 맞아도 좋겠지...."
"형님이 오신다면 저는 언제든 대환영이죠.... 전에 꽤 많아 보이던 그 술도 혼자 야금야금 먹으니 다 없어지던 걸요. 그냥 별 생각 없이 살고 싶어요.... 어디든 왔다갔다하고...."


 나는 그 날,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던 새벽길을 오랜 시간을 들여 와 준 아우를 꼭 껴안아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글을 쓰기 위해 단어 공부만 3년을 꼬박 했다는 그의 글에서 얼마나 향토색 짙은 흙 냄새가 나는지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 날 우리 문단의 제도적 모순과 글 쓰는 이의 애환에 대해서도 말을 나눴지만 빨리 글을 쓰라는 말은 못했다. 절제를 중시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욕구와 그로 인한 삶의 비틀림을 경멸하듯 말하는 그 앞에서 나는 아직도 도무지 절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만남을 도외시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에서 만남을 절제하며 사는 고행 같은 아름다움이 내게는 그림처럼 보인다.
 지금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하여 '글은 왜 쓰는가, 왜 쓰려 하는가'하는 질문도 하지 못했다.
 안 하길 잘했다. 참 바보 같은 질문 아닌가.

 

 

 

                                                                

2005년이던가 2006년이던가.

그것도 가물가물하고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가을이나 겨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여튼 그 어름에 양섭 선배와 김천 직지사를 갔었다. 인근에서 문학동호회 모임이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다.

양섭 선배가 직지사 경내를 거닐며 나누었던 대화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았기에 그대로 가져와 적었다.

그때는 나름으로 치열하긴 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유치찬란하여 민망한 느낌도 있다.

 

직지사를 그렇게 방문했던 경험이 있거늘 도통 한 편린도 기억이 안난다. 산문이 어찌 생겼는지 들어가는 길은 어땠는지 절이 컸는지 작았는지.

오랜 만에 다시 찾아드니 난생 처음 온 것 같다. 도량이 아주 넓다. 3대 사찰이라는 송광사 해인사 등에 비해 절대 작지 않다. 오히려 더 큰 것 같다. 아마 으리으리한 건물들을 꽤나 많이 더 지어서 그때보다 훨씬 가람 규모가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구인사를 보고 그 호사스러움을 비난했는데 직지사의 건물들도 내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건 도량이 아냐 돈지랄이지.

마는 그래도 이방인들이 관광하기엔 또 그만한 조건도 없으니 쯧이다.

 

문학동호회의 결속력도 진작에 희미해졌고 양섭 선배의 근황도 잘 모르겠다. 세월의 본질이다.

산중 가람 직지사에도 깊은 겨울이 시작되었다.

 

 

 

 

 

 영화 <디어 헌터> 중 Cava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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