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계절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가을인 건 확실한데 이른 가을이었는지 한가을이었는지 모르겠다.
동학사 지구의 한 산장에서 문학카페 모임이 있었다. 아, 그때가 카페로서도 나로서도 절정기였던 것 같다.
글 쓴다는 사람들 모여야 늘 그렇다. 세상 고뇌와 걱정을 다 짊어진 듯한 태도들. 술 한 잔 거나하게 취하면 또 넋두리들. 그런 것들이 싫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나 그 부류의 한 패거리로 한창 문학적인 정열이 차 있었다는 짐작을 한다.
게다가 연정을 품었었고 잠시 연애도 했던 그 여인이, 헤어진 그녀가 동학사 그 모임에 온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도 꺼려지질 않았다. 그녀를 만나는 불편함보다는 여러 문우들 얼굴을 본다는 것이 더 끌렸다. 지금이라면 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가지 않을 것이다.
그 밤을 술과 잡담으로 보내고 이튿날 아침 헤어져 흩어질 때까지 그녀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여러 사람들 지껄이는 통에 휩쓸려 웃거나 가끔 눈길을 건네는 것이 전부였다. 참 나도 못났다. 그게 뭐라고. 그냥 평상적인 말마디조차 못할 게 무엇이람. 말 섞는 게 불편했다면 여전히 그에게 미련과 섭섭함 그리고 앙금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결국은 한마디, 심지어 떠날 때 인사말조차도 없이 완전히 헤어졌다. 그 미안함이 못내 가슴에 우무처럼 엉겨 있었다.
아침의 동학사 계곡엔 안개가 자욱했다. 아! 이제야 알겠다. 안개에 젖고 있는 벚나무 잎들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가을도 제법 깊어 있었음을 깨단한다. 다들 보내고 누나 뻘인 여성과 단둘이 동학사를 둘러보았다. 연도에 늘어선 나무들을보며 무슨 나무냐고 묻는 걸 내가 벚나무라고 일러주면서 벚나무도 가을 단풍이 제법 예쁘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가을 아침에 들러보았던 동학사는 전혀 기억에 없다.
이 봄에 다시 동학사를 찾았다. 한번 왔었다고는 하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 낯선 도량. 그 유명한 동학사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응은 없다. 단지 알싸한 이른 봄의 기온이 주는 청량감과 아직 나목으로 서 있는 벚나무와 느티나무 가로수길이 아주 근사하다. 노랗게 핀 산수유만 아니면 영락없이 낙엽 진 늦가을의 정취다. 아, 가을!
그해의 가을이 참으로 허랑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이 봄의 이 풍경도 역시 그러하다. 거기에 새봄이 주는 약간의 싱싱한 설렘이 첨가됐다. 지금의 계절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시골의 면소재지 정도면 잘해야 모텔 하나 정도 있고 웬만한 곳은 그마저도 없는데 동학사를 소유하고 있는 반포 면소재지에는 어엿하게 모텔촌이 형성돼 있다. 유명 사찰 하나가 그 지역경제를 크게 좌우하는 것이다. 고창의 선운사. 청도의 운문사, 합천 해인사 등에 지자체가 크게 의존하고 프랜차이즈 관광지로서의 공을 들이는 있는 이유겠다.
아직은 냉한 숲속 낙엽 속에서 어느 새 상사화가 이렇게 자랐다. 저 푸른 잎이 지고 난 후에 꽃이 핀다. 잎과 꽃이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애틋한 정념의 상사화. 그래서 문학의 소재로 자주 쓰이는 생명.
그러나 봄꽃들의 대부분이 다 그러하다. 나목에 먼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시들어 다 지면 잎이 나온다.
동학사 가는 길에 저 상사화가 아주 많은 걸로 보아 사찰 측에서 우정 심었나 보다. 때 되면 상사화의 화려한 물결을 감상할 수 잇나 보다.
복수초. 눈속에서 노랗게 솟아나는 꽃봉오리만 보았지 저렇게 활짝 벌어진 꽃은 처음이다.
천지엽 작사 서영은 작곡 남미랑 노래 : 동학사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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