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평창 월정사 전나무길

설리숲 2019. 10. 31. 00:37


 일상이 무료하면 사람들은 문밖을 나가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보통의 사람들은 엄두를 못내고 그리워만 하다가 만다.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또 대부분 바다를 동경한다. 좋다. 드넓은 바다는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단 한 시간만 그곳에 섰다 오면 어느 정도 마음이 치유된다.

 

숲으로 가 보자. 일상의 답답함이 없어도 유혹하는 것이 숲이다. 숲은 만병통치약이다.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실은 치료약이라기보다는 더불어 공존하고 상생하는 존재다.

 

국내 아름다운 숲길을 많이 다녀 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월정사 전나무길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기분이 좋을 때도 울적할 때도 찾아가 걷고 싶은 이 로망.

 

녹음이 절정으로 치닫는 여름의 한가운데.

숲이 뿜어내는 기운에 숨이 가쁜 듯한 느낌이다. 나무들은 요란스레 움직이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고요한 적막감에 귀가 먹먹하다. 관광객 인파가 물밀 듯 왕래하며 내는 소음도 숲이 철저하게 흡수하기 때문이다.

 

벌써 넉 달 전의 여행이라 그때의 감흥을 되살리지 못하겠다. 대신 예전의 편린들이 실바람처럼 감겨든다.














이곳은 다람쥐 천국이다. 광광객 숫자만큼의 다람쥐가 숲으로 길로 벤치로 나돌아다닌다. 워낙 사람들을 많이 대껴서 도망은커녕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와서 발끝을 톡톡치는 놈도 있다. 두려움이 없는 건지 인간을 신뢰하는 건지. 아무튼 자연과 생명은 고귀한 존재들이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20년 전, 수도승처럼 만행을 다닐 때 이름만 들어 알고 있었던 월정사를 난생 처음 들었었다. 진부에서 두로령을 넘어 홍천 내면으로 갈 계획이었다. 길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이라 이 위대한 숲길을 만나고도 그닥 큰 감흥이 없었다. 만추라 상원사를 오르는 오대천가의 단풍이 절정이어서 그것만이 길래 남아 있다. 상원사에 당도했을 때는 벌써 어둑하게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걸어 영을 넘을 생각이었다. 등에 텐트를 지고 있으니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사람 그림자 없는 깜깜한 밤길은 그러나 만만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짐승 소리가 났다. 학계에선 멸종됐다는 여우소리도 들렸다. 승냥이나 늑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세상 두려움 없던 혈기가 그만 시르죽어 버리고 새로운 감정인 두려움이 생겼다. 오던 길을 되돌아 세 시간여를 걸어 멀리 상원사 휘황한 불빛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맥이 풀렸다. 그리고 그쯤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였다. 먼 짐승들의 소리는 밤새 들려왔다.



월정삼거리에서부터의 정겨운 농촌풍경이 더 좋았다. 연도에는 당근밭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창 수확 철이어서 밭마다 붉은 당근들이 덮여 있는 이색적인 풍광이었다. 가로수 아래 앉아 잇는데 서늘한 가을바람이 지나가면서 까닭 모를 울음을 울었던 기억. 인생의 정체를 깊이 성찰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별러 왔던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나날이기도 했다.

월정사에서 소지로의 오카리나 연주를 듣고 음반 <대황하>를 샀다. 그것이 또 오카리나와의 인연이었다.

 

내 삶을 돌아보면 삼 년 남짓의 그 나날들이 가장 호화로운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느리지만 조급하지 않았던 여유. 달팽이였다.

그로부터 이태 뒤 나는 산속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오카리나를 불었다. 그리고 소설을 썼다. 후회 없는 나날이었다.

 


지금은 만추. 가을이어도 전나무는 성하처럼 푸르겠지만 일대는 만산홍엽 마지막 가을을 불태우고 있으리.








 





본 윌리암스 : 푸른 롯소매 환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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