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순천 송광사길

설리숲 2019. 10. 9. 00:56


어둠이 짙은 새벽. 새벽이라기보다 한밤중이다. 순천터미널에 내렸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터미널 대합실은 닫혀 있다. 송광사를 갈 요량이었다. 송광사행 첫차가 545분임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두 시간여를 기다려야 하는데 터미널이 닫혀 있으니 시간을 죽일 데가 마땅히 없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다. 얼마나 비가 왔을까. 포도가 흠씬 젖었고 빗물 고인 웅덩이도 군데군데 보인다. 이젠 깔축없는 가을이다. 어둔 터미널 광장에 앉아 잠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바로 보이는 김밥집에 들어가 해장국을 먹는다. 여행의 본질은 어쩌면 시간 죽이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한다. 서두름과 조바심을 데리고는 온전한 여행을 할 수 없다. 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결코 허비가 아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을 보며 오만가지 인간사를 보는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종종 돌아온 후 그것이 더 잔상에 남을 때가 있기도 하다.

해장국을 먹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낯선 거리를 걸어보기로 한다. 깜깜한 이방이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내 주머니 속에는 스마트폰이라는 첨단 문명기가 있다. 그것이 여행지에서 아주 요긴하기 짝이 없다.

포도 위에 빗물에 흠씬 젖은 가로수 잎들이 엉기정기 늘비하다. 밤공기가 상쾌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년 내내 이 기온만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한다.








송광사에 내렸다. 훤하게 아침이 밝아 있다. 같이 타고 온 사람이 여자였다는 걸 그제서 안다. 터미널 앞 정류소에서 첫 버스를 기다리고 앉았는데 저만치서 가방을 둘러멘 낯선 사람이 온다. 걷는 폼이며 발소리며 남자로 짐작했다. 확인하고도 싶었지만 불량기 있는 사람이면 괜히 시비라도 붙을까 겁나 그리 짐작만 했다. 그도 첫 버스를 타려 했음인지 다가오다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저만치 뒤로 물러나 섰다. 이어 담배연기 냄새가 난다. 아하, 나를 배려해서 멀리 떨어졌구나. 불량한 사람은 아니구나.

그랬는데 송광사에서 내리고 보니 여자였다. 얼굴만 곱상하지 행색이며 태도는 영락없는 남자다. 우리는 늘 알지도 못하고 상대를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허울 뒤에 가려진 진실을 잘 분간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이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은 짧게 끝나고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제 갈 길을 간다. 제 갈 길이라지만 어차피 둘 다 송광사길에 들어섰으니 또 만나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또 만나지지는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뜸한 산문길이다. 비가 제법 많이 왔나 보나. 이미 버스에서 내릴 때 계곡의 물소리가 와르르 달려들었었다. 맑고 풍성한 물이 절정 되어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청청하다. 새초롬하고 헌거롭다.

송광사를 12년 전에 다녀갔었다. 그때도 언제 다시 이곳을 오게 될까, 아마 다시는 올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하고 떠나왔었다. 그런데 다시 이 길을 걷고 있다. 그때의 기억들은 전혀 없다. 처음 온 것처럼 다 생경하다. 그러다 경내에서 파초를 발견했는데 그거 하나만은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여전히 살아 있는 게 반가웠고, 세월 지났는데 전혀 자라지 않은 것은 신기했다.








이곳 불일암은 법정 스님이 17년간 기거한 곳이다. 길상사에서 입적한 후 유골은 이곳 불일암에 묻혔다. 생전 후박나무를 좋아하여 직접 심었는데 그 나무 아래 열반했다.

새로이 불일암 오르는 이 길에 <무소유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특별하지 않은 범상한 길이지만 기분 탓인가 마음이 정갈해지고 비워지는 느낌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비온 후의 날씨라 돌아 나올 때까지 하늘은 흐려 있다.

 

, 잊고 있었는데 가을이었지!










 





김창기 작사 작곡 동물원 노래 :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한국의 아름다운 길 마흔 셋



'서늘한 숲 > 한국의 아름다운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강역으로 가는 길 춘천  (0) 2019.10.23
괴산 산막이옛길  (0) 2019.10.14
칠곡 팔공산 한티재  (0) 2019.10.04
속초 장사항에서 고성 삼포 해변까지  (0) 2019.09.25
울진 산길  (0) 2019.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