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 있었다면 온갖 관심과 총애를 받았을 어여쁜 고독이,
(너무나 많은 관심 덕에 이 손에 치이고 저 손에 치이다 종내 스러지고 말겠지만)
바다처럼 일렁이는 거대한 화군(花群)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선 자태로는 그 누구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꼭 나를 닮은 것 같아 마냥 애정이 갑니다. 그러니 나라도 어여쁘게 보아주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이 사진을 찍은 건 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꽃무릇이지요. 여기 불갑사와 함께 3대 유명 군락지가 인근의 함평 용천사 고창의 선운사로, 다 절집 주변에 있는 건 탱화를 그릴 때 요긴한 재료로 쓰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중에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지라 ‘중의무릇’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상사화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식물 외형도 물론 다르지만
차이점은,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났다가 잎이 지고 나서 여름에 꽃이 피고,
꽃무릇은 가을에(그러니까 요즘 철에) 꽃이 피고는, 꽃이 지고 나서 잎이 납니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꽃무릇의 꽃말은 참사랑이라네요.
둘 다 꽃과 잎이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애절한 식물이라 사람들이 그것을 동정하여 수많은 문학작품에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꽃무릇도 넓은 개념으로는 상사화에 속하는 걸로 인식하여 이곳 영광에서도 ‘상사화축제’라 한 모양입니다.
며칠 전부터 태풍 타파가 온다고 요란을 떨었습니다. 그게 하필이면 주말이었고 과연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밀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화무십일홍이라. 폭풍우를 무릅쓰고 이리 미어터진 건 다음 주에는 꽃이 다 지고 말 것이라는 조바심 때문이겠지요.
아무려나 우중에도 꽃무릇의 매력은 강렬했습니다. 오히려 우중충한 환경에서 더욱더 돋보이는 듯 했습니다. 어둔 숲속의 촛불입니다. 박현자 시인은 맥문동을 보랏빛 촛불이라 했는데 꽃무릇은 영락없이 빨간 촛불들이었습니다.
꽃잎에 매달린 영롱한 빗방울이 눈과 머리를 가뿐하게 해 주었습니다.
꽃무릇의 생태와 생애를 나에게 깊이 이입시키면서 공연히 숙연하고 심신이 정갈해지는 체험을 한 날이었습니다.
안날과는 확연히 다른, 하루 사이에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선선하기보다 으스스하게 춥던 날이었습니다. 이제 여름이 완전히 가 버렸습니다.
원래는 불갑사를 보고 밤에 부산으로 갈 요량이었는데 태풍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포기하고 그대로 컴백홈하였습니다.
잔술 파는 부스에서 비로소 상사화를 봅니다.
지금은 이것이 있을 철이 아닌데 막걸리 빈병에 꽂혀 얼마나 지냈을까요.
청초한 저 자태는.
당신은 이 마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미워하는 것 밖에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대 나의 고통을 외면하나요
당신의 목소리는 이제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나는 하염없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잊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그때는 오직 어두운 밤이, 그 밤이 있을 뿐이니!
별들은 사라지고
희미한 달빛과 함께 사랑이 울고 있습니다
밤은 공허하고
작은 희망마저 아스라이 멀어지는 듯한 절박감에
쓰린 눈물만이 흘러내립니다
상처 입은 가슴, 체념
사랑은 스쳐가는 바람 되어 사라지고
텅 빈 꿈속에서 난 무엇을 보고 삶을 지탱할까요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월의 마지막 밤 (0) | 2019.10.31 |
---|---|
거좀 제대로 합시다 (0) | 2019.10.09 |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0) | 2019.09.01 |
대프리카의 저녁 (0) | 2019.08.25 |
소확행 (0) | 2019.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