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경주 황리단길

설리숲 2019. 5. 20. 01:29


하여튼 한국사람들 남의 것 따라하기 참 좋아한다.

황리단길이 무엔고?

서울의 경리단길이 명소로 각광 받자 망원동엔 망리단길, 송파동엔 송리단길, 수원 행궁동엔 행리단길, 부산 해운대엔 해리단길. 우후죽순처럼 마구마구. 그리고 경주 황남동엔 또 황리단길. 미치겠군.

왜 그리 개성들이 없는지. 개성은 없더라도 이름은 좀 다르게 하지 이 무슨. 유치한지고.





 

경주.

그와 헤어진 도시. 어느 한 장소를 두고도 사람마다 얽힌 사연은 숱하기 마련이지. 사랑하던 사람과 마지막 밤을 보낸, 내게는 이별의 도시였다. 무더위가 극성이던 여름이었다.

여름이 끝나고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고 깊은 산 중턱엔 벌써 나뭇잎이 발갛게 물들 무렵 그에게서 이별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럴 거라 이미 각오는 했었지만 허탈하고 섭섭한 건 사랑의 깊은 여운이었겠지.


 

지나가는 바람이라 여기자 그랬죠. 그럽시다. 그리고 바람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정처 없이 시내를 서너 시간 걸었나 봅니다. 불과 두 세 시간 전까지 보냈던 시간들이 아득하게 여겨지더군요. 이젠 억지 친구로도 남을 수 없으니 정말 아득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위로가 되어준 사람으로 내 안에 남아 있을 겁니다. 당신도 당신 나름의 의미로 나를 추억해주길 바랍니다. 어차피 끝이 보이는 길이었으니 여기까지가 그 끝이라 해서 문제 될 것은 없겠지요. 내 결정대로 따라주겠다 하셨지요. 그렇게 해 주세요. 연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혹시라도 다시 문자를 받는다면 당신의 냉정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무시해 주세요. 고맙고 미안합니다. 잘 살아 갑시다. 안녕.

 


















여러 날 봄가뭄이 지속되더니 주말 이틀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를 듣고 우산이랑 옷까지 챙겨 경주로 가다. 비가 오긴 했는데 좀 시원하게 뿌려주면 좋을걸. 비옷은 필요 없고 작은 우산만으로 피하게 찔끔거렸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비가 내려서인지 황리단길은 인적이 거의 없다.

한적한 길을 홀로 걷는 게 좋다. 내 몸에 밴 고독이 편안하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은 황리단길은 나름 좋았다. 아기자기 예쁘다. 다른 곳에 없는 기와 고가들이 공존하고 있어 나름의 독특한 운치가 있다.

 

오후로 접어들고 비가 누꿈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차와 사람이 뒤엉켜 아주 혼잡스럽다. , 같이 어울린다는 건 하나의 고행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오랫동안 안부 모르던 여인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내 병상일지를 읽고 마음이 아팠다 한다. 우리나라 드라마의 단골 설정이 드라마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있긴 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되고 그렇게도 반목하고 갈등하던 사람들이 그걸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급하게 해피엔딩하는. 한계를 극복 못하고 역량미달인 드라마작가들을 늘 비웃곤 했는데.

내 입원과 수술이 이런 계기가.






S.E.S : Dreams Come True





경주터미널 화장실은 최악이었다. 변기는 막혀 똥물이 엉겨 있고 그 옆간은 휴지가 막혀 역시 물이 넘치고. 이미 더워진 날씨에 악취가. 세계적인 관광도시 경주 운운하면서 그 관문인 터미널이 그 지경이다. 도대체 청소를 안 하는 거냐.

내 이별의 낭만(?)이 남아 있는 이 도시가.






'서늘한 숲 > 한국의 아름다운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양주 광릉숲길, 걷고 싶은 길  (0) 2019.06.04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0) 2019.05.27
영주 무섬 외나무다리  (0) 2019.05.12
단양 남한강잔도  (0) 2019.04.29
영광 백수해안도로  (0) 2019.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