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수술

설리숲 2019. 5. 16. 00:46

 

 관장을 하고 제모를 하고 금식을 하고 아침에 일찍 수술하다.

수술실 풍경은 난생 처음이다. 침대에 누워 방향감각은 없고 천장만 빠르게 지나간다. 몇 사람인지는 모르고 침대를 밀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 몇이이 내 시야에 잠깐 들어왔다 사라진다. 의학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장면들이다. 여자 얼굴도 보인다. 침대를 밀고 가는 그들의 대화중에 딱 한 단어만 머리에 들어와 박힌다. 캔서야? .

캔서는 나도 알지. 그 악명 높은 단어를.

 

너무 늦게 왔네.

일주일 전 처음 내원해서 초진을 받고 마주앉은 주치의는 겁주는 걸 좋아하는지. 귀두 부분에 사마귀 따위가 났는데 백프로 확실하진 않지만 자기가 보기엔 암인 것 같고 아마 맞을 것이라고 한다. 사마귀들을 떼어내면 되지만 그것만 가지고 완치를 보장할 수는 없으니 절단하는 게 좀더 확실하다고 한다. 그마저도 백프로는 장담을 못하겠고 그 후로 진행 상태를 보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이미 암세포가 몸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서서히 퍼지면서 사망하게 되는 거지요. 한 사람의 생사를 말하면서 너무나도 무상하게 장난처럼 말한다. 그 상황이 장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감정 없이 진단을 내리는 의사가 서운하기 보다는 마음이 더 편했다. 의사가 심각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내 죽음을 걱정했으면 고통이었을 것이다. 선택을 하시지요. 혹만 떼어내는 수술을 할지 절단을 할지. 무거운 선택. 인생은 수많은 선택으로 점철된 것이지만 참으로 무겁고 절박한 선택이다.

절단해도 끝부분만 조금 잘라낸다고, 절단을 해도 성관계, 임신 등 모든 기능은 상실하지 않는다는 말로 은연중 절단을 권고하는 뉘앙스를 준다.

 

고깃덩어리. 옛날 소년시절에 스님들의 수행과 구도이야기를 쓴 소설을 읽었었다. 불교 수행자들에게 성기는 극복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물체였다. 오줌은 눠야하니 잘라버릴 수는 없고, 더구나 함부로 몸을 상해서는 안되는 게 불교윤리다. 그들에게는 염불보다도 더 절실한 게 성기였다. 시시때때 찾아오는 마군도 그 근본은 성기라고 치부했다. 그들이 애써 비하하면서 만든 은어가 고깃덩어리다. 그냥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거늘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참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의사 말대로 성기능이 살아 있다 해도 내 이제 그것을 쓸 일은 없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번뇌하며 초월하고자 하는데 나는 저절로 그것이 해결되니 얼마나 미리 축복을 받은 것인가. 어쩌면 그들보다 더 가까이 구도의 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고추가 아닌 가지를 달고 나왔다는 전설 같은 풍문이 있었다. 이제 그 끝을 자르면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될 터이니 그리 억울할 건 없다. 단지 있던 것이 없어지는 상실감이 좀 있을까. 자궁을 들어낸 여자의 심정을 조금은 알겠다. 여성성을 잃어버린 그 처참한 심경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까짓 고깃덩어리!

절단하겠습니다.

 

드디어 수술실에 도착했다. 보이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지만 수술실에는 주치의를 비롯해 대여섯 명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두어 명의 여자 목소리도 들린다. 그 중의 하나는 직접 메스를 들고 나를 수술한다. 하반신이 마비된다. 그것이 고통스럽다.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는 절망감. 그것이 일시가 아니고 영원히 그 상태라면 참말로 살아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어릴 적부터 자주 보아 왔던 소아마비 장애인들을 떠올렸다. 얼마나 고통스런 생을 살고 있는가.

 

수술실로 향할 때 휙휙 지나가는 천장이 보일 때부터 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흥얼거렸다.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내 머리와 몸 안으로 음악이 흘렀다. 출발선에 설 때까지 헤드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박태환 선수처럼 긴장되거나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사실 수술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냥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차르트가 흘렀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밝고 현란해서 좋다. 아주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지라 늙어본 적이 없는 그의 음악은 전부다 생기발랄하다. 위대한 젊은 예술가여, 일찍 생을 마감한 당신을 연모하나니.

 

하반신 마비의 고통을 견디고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 수술하는 동안 참여한 그 누구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저 마비의 고통과 위대한 젊은 음악가와 평생을 고통으로 살아온 장애인들, 그리고 고깃덩어리. 저 아래서 잘려 나가고 있을 불쌍한 내 분신을 생각했다.

 

 

만 하루를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다. 머리도 들면 안됐다. 척추에 마취제를 넣어서 머리를 움직이면 평생 두통에 시달린다고 보라돌이 간호사가 엄포를 놓는다. 수시로 들어와서 말을 시키면 습관처럼 머리를 들곤 해서 그때마다 간호사가 큰소리로 야단을 친다. 마취는 저녁 어두운 후에야 풀렸다. 물 한 모금도 마셔서는 안 되었다. 몸은 까라지고 하루 종일 시체처럼 같은 자세로만 누워 있으니 그것 또한 견디기 힘들엇다. 입술이 바짝 말라 보다 못한 간호사가 적신 거즈를 입술에 붙여주고 간다. 오늘 자정까지만 참으시고 자정 넘으면 물을 드셔도 돼요. 내일 아침엔 식사도 하실 거예요.

병원에 보내놓고 회사동료들은 궁금해 연신 문자를 보낸다. 문자는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저녁에 문병을 오겠다는 걸 애원하다시피 해서 오지 못하게 했다. 그날의 내 몰골을 도저히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다소 생기를 회복한 이튿날 저녁에 다녀갔다.

수술보다도 그 후유증이 고통스러웠던 생애 최악의 날이었다.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모차르트 론도 D장조 K.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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