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할 때 책을 두 권 가지고 갔다.
황석영의 <해질 무렵>과 최인훈의 <광장>이다.
<해질 무렵>은 읽고 나서는 우리네 허무한 인생의 본질을 본 것 같아 말 그대로 헛헛했다. 병상에서 읽기 딱 좋은 소설이다.
<광장>은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이었다. 솔직히는 읽으려고 ‘노력했던’ 소설이었다. 최인훈 특유의 독특한 구성인데다가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에 공을 들이고 의식의 흐름에 천착한, 애초에 맘먹고 집중할 생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재미없어 그만두기 십상인 소설이다. 전에 두어 번 읽으려다 이같은 이유로 그만두었었는데 지루한 병상생활에는 그래도 견디고 읽어내지 않을까 싶어 우정 준비해 갔다.
일단 단단히 맘먹고 집중하니 그 매력에 빨려 들어갔다. 얼핏 최인훈이 노벨상 수상자감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소설은 빼어난 수작이다.
‘광장’은 그의 이상향이다. 그러나 이념도 사상의 변화에도 그가 고대하는 광장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절망한다. 우리는 누구나 ‘광장’을 꿈꾸지만 그것은 무지개 같은 허랑한 것이다. 아니 무지개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라도 있지만 광장은 그 형체도 보이지 않는다.
6·25 전쟁이 나오고 북한군으로 참전한 남녀주인공은 포탄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격전지에서 동굴 하나를 발견하여 기거한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건국대충주병원은 리모델링하느라 소란스러웠다. 하루 종일 텅텅대는 소리 나고 때로는 벽이 울리기도 했다. 위 6·25 전쟁 장면을 읽을 때마침 요란하게 쿵쾅대고 벽이 흔들려 완벽한 음향효과로 정말 실감나게 책을 읽었다.
주인공들이 들었던 동굴이 상상됐는데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지난 가을 다녀왔던 청송 주왕굴이었다. 어쩌면 작가가 전에 한번 그 동굴을 본 적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정도로 소설 속의 동굴과 내가 본 주왕굴은 일치했다.
몹시 주왕굴이 보고 싶었다. 퇴원하면 맨 먼저 다녀오리라 작정했다.
그리고 다녀왔다.
당나라 때 주도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참칭하고 역모를 했다가 크게 패해 머나먼 신라로 숨어들었다. 당(唐)에서는 신라 조정에 그를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니 신라는 장군 마일성을 주도가 숨어 있는 지금의 주왕산으로 파견하였다.
이곳은 지형이 절묘해 사방이 기암절벽으로 막힌 천연 요새여서 한번 들면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다. 신라군은 연일 실패만 거듭했다. 그러다가 어느 아침 벽에서 흘러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던 주도는 적장에게 발각되어 화살과 철퇴를 맞고 죽었다. 그것이 주왕굴이고 산은 주왕산이 되었다.
과연 주왕굴은 천연요새다. 사방이 높은 바위로 둘러쳐 있어 주왕암 쪽 사람드나드는 좁은 입구만 봉쇄하면 완벽한 세계다. 이곳을 들어가는 방법은 헬기도 불가능하고 요즘 유행하는 드론만 가능하다. 주왕굴 앞에 서서 한 평 쯤 돼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 이런 데서 철저하게 고립되어 고독하게 살면 좋겠다. 고독하게 살면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외롭게 죽고 싶다.
주왕굴에는 주왕이 모셔져 있고 비손하는 사람들의 소망이 서려 있다. 어두워지면 제법 무서울 것 같은 서늘한 귀기가 느껴진다.
동굴 앞에 서서 진정 참회하며 기도했다, 물론 마음 속으로였다. 무엇을 참회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모든 것을 비우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에 대한 감사기도의 의미도 있었다. 짙은 어둠과 눈부신 빛의 교차점에 선 야릇한 느낌의 기원.
벼랑에 진달래가 피어 있다. 꺾지 못할 곳의 꽃은 유난히 더 아름답다. 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아, 나의 ‘광장’은 결국 숲이란 걸 깨닫는다.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서늘한 숲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