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평창 방아다리약수터 전나무길

설리숲 2019. 2. 25. 00:15


숲의 고요가 좋다.

도열한 전나무들은 말이 없다.

말이 없는 것들을 좋아한다.

 





밤부터 비가 내렸다. 내내 가물었던 겨울을 적시는 약수였다. 비는 길과 나무와 낙엽과 개천을 흠뻑 적셨다. 겨울을 나는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도 흠뻑 적셨다.

늘푸른나무들이 한층 생기 있게 그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고요한 숲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정결하게 가슴으로 들어온다.

길섶에 여러 편의 시를 적어 팻말을 세워 놓았는데 비 내리는 날도 염두에 두었을까. 천상병의 시가 있다. 나를 적셔 스며드는 비와 빗소리의 감흥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빗소리를 듣는다
   밤중에 깨어나 빗소리를 들으면
   환히 열리는 문이 있다

   산만하게 살아온 내 인생을
   가지런히 빗어주는 빗소리
   현실의 꿈도 아닌 진공의 상태가 되어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눈을 감으면 넓어지는
   세계의 끝을 내가 갔다

   귓속에서 노래가 되기도 하는 빗소리
   이 순간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까
   빗소리를 듣는다

 

             천상병 <빗소리를 듣는다>

 

 





 

KBS가 명절 특집으로 제작하는 다규멘터리 <나무야 나무야> 시리즈. 이번 설에는 평창 방아다리약수터 일대의 전나무숲이 방영됐다. 그때 나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문득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방아다리약수터는 전에도 몇 번 들렀었다. 전에도 입장료를 받았던가.

오래되지 않은 2년 전에도 다녀왔었는데 그때 입장료가 있었는지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겠다. 어쨌든 입장료가 2천원이다.

유명한 방아다리약수는 전나무숲을 다 지나 숲속 깊은 곳에 잇다. 단순히 약수를 마시러 가는 탐방객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니 불만도 있을 것 같다.












비 내리는 날은 새소리도 없다. 오로지 빗소리만 들린다.

이따금 여행자들이 전나무길에 들어선다. 설인데 전 안 부치고 그윽한 여행을 하는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들인가. 나처럼 반드시 가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인가.

 

숲 안에 카페가 있다. 저기압으로 모든 것이 낮게 가라앉는 환경이라 커피향이 가득하다. 카페 안에서 보이는 숲의 풍경은 또 다르다. 표구하여 건 잘 찍은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지인과의 오랜 통화. 이 고요 속에서도 속세의 줄은 어김없이 이어져 온다. 설날 스케줄을 정하고 약속을 잡고 그러고도 이어지는 시답잖은 이야기들.









어쨌거나 비와 함께 겨울은 끝나가고 봄처럼 길 위로 빗물이 흘러 어쩐지 싱숭생숭 가슴이 싱그러워진다. 아마도 전나무 뿌리 아래는 무엇들이 꼬물대고 올라오고 있을 터였다.







숲의 고요가 좋다.

나무들은 말이 없다.

그 침묵을 좋아한다.




             어네스토 코르타자르 : 베토벤의 침묵

     




 한국의 아름다운 길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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