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설리숲 2019. 1. 18. 00:00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 마태 7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 눅 18

 

성경의 구절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비신도인 나는 항상 물음표를 가지고 성경을 대하곤 한다. 넓은 문은 왜 멸망으로 가는 길인가. 부자는 죄인이 아닌데 왜 천국으로 가지 못하나. 가난이 선()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 쉽다는 것인가.

성경은 저렇게 말하는데 한국교회는 부자들만 편애한다. 돈 많은 사람이 장로가 되고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신앙심도 깊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성경 그리고 교회에 자꾸만 트레바리를 놓는다.

 

성경과 교회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저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쓴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을 이야기하려 한다. 더 엄밀하게는 소설 <좁은 문>에서 내 외종사촌누이를 떠올렸다.

 

서양 놈들은 짐승과 같아서 이놈하고도 붙고 저놈과도 붙는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신기했었다. 예술가 누가 무슨 백작부인을 사랑하고, 음악가 누구도 어느 부인과 연애를 한다는 일화들이었다. 남의 부인과 사랑을 한다니 말이 좋아 자유분방이지 동네 개들과 다름없는 그들의 문화풍토와 관습이 어이없었다. 이런 문화의 차이가 어느 정도 면역이 되면서 사촌간의 사랑을 그린 <좁은 문>을 거부감 없이 대할 수 있었다. <좁은 문>뿐이 아니라 우리가 명작이라 꼽는 서양의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렇다.

 



 

워낙 사람과의 부대낌을 싫어하는 천성이라 사귀는 친구도 없고 홀로 사색하고 산책하고 독서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연 친가와 외가의 친척들 집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친척들이 집에 오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사춘기가 되자 그러한 성정은 더 강해져 엄마와 어딜 가는 것도 싫어졌다. 결혼이나 장례 등 대사에서 어쩌다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나 그런 행사에 아예 안 가는 경우가 많았다. 친가와 외가 사람들 공히 평생에 한두 번 볼까하게 혈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내게는 먼 사람들이었다.

 

외가에 사촌이 몇 명 있는지조차 모르고 또 관심도 없었다. 큰외삼촌의 장남이 가끔 집에 왔었다. 형은 인물이 무척 좋았다. 나훈아를 닮아서 누나들이 별명으로 나훈아 오빠라고 했던 기억이다. 큰외삼촌의 고종사촌 얼굴을 본 건 그 형이 유일했다.


3때의 가을이었다. 아니 겨울이었던가. 아침이면 무밭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는 매우 살살한 그 어름이었다. 큰외삼촌 생신이어서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갔다. 당연 가기 싫었지만 웬일인지 여느 때와 다르게 어머니의 지청구과 잔소리가 완강해서 마지못해 끌려간 셈이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사촌누이를 보게 된 것이다. 아주 여리고 예쁜 누나였다. 정말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자연스레 연상하게 되는 맑고 고운 캐릭터였다.

외가는 아주 궁벽한 촌이었다. 외삼촌 내외는 농사를 짓고 자식들은(그 집 사촌이 몇인지는 지금도 모르고 있다) 객지에 나가 생활하고 있었다. 외삼촌 생신이라 도시에 나가 회사를 다니는 그 누나도 저녁에 도착했다. 어찌 저렇게 얄상하게 이쁘게 생겼을까. 나는 단박에 그 누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저것 이야기도 나누었으면 좋았으나 나는 워낙 말이 없고 얌전한 아이였고, 게다가 첫눈에 누나의 미모에 빠져 더욱 샌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훈아를 닮은 형도 잘 생겼고 누나도 예쁘니 보지 못한 그 집 다른 사촌들도 아마 다 그럴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누나는 그해 겨울을 넘기면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얼마나 서운하고 속상했는지. 그렇다고 이성으로서 누나를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요즘말로 갑툭튀라고나 할까. 생각지도 않았고 더구나 친척의 일이란 관심조차 없어 미지의 세계와도 같던 외가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아름다운 여인은 확실히 연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성을 그리워하는 청춘의 시절이었다.

 

누나의 방으로 짐작되는 사랑방에 앉았다. 하루 종일 외삼촌이 군불을 때 방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앉을뱅이책상에 책권들과 낙서장등이 있었다. 낙서장을 열었다. 누나의 낙서들이 채워져 있었다. 20대 중반 꼭 그만한 나의의 아가씨들이 주절거리는 낙서들이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 하나가 김학래의 노래 가사였다.

낙서장을 뒤적거리는데 누나가 밖에서 보고는 들어와서 빼앗았다. , 이거 별거 아냐. 그러면서 큭 웃었다. 누나도 나도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서로가 보고 웃었는데 아, 그렇게도 예쁜 얼굴이란! 목소리도 또한 예뻤다.

홍림이 너 그렇게 착하다매? 맨날 책만 보고... 공부는 잘 하니? 너 글을 참 잘 쓴대매?

 

세상에나. 누나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내가 글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외가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데. 누나의 존재조차도 몰랐는데.

황송하면서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는 친정나들이 때면 자식자랑을 줄곧 했었나 보다.

누나가 내 이름을 불러 준 것이 황홀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나는 방을 나갔는데 저녁식사 때 저쪽 방에서 여자들만의 밥을 먹는 것을 멀찌감치 보고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식사를 할 때도 보지 못하고는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조바심이 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누나를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아니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평소 어머니의 습관대로 하룻밤 더 자고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때가 되자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포기하고 오줌을 누려고 뒤꼍 싸리울을 돌아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 초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빈 옥수수대궁을 휘젓고 지나갔다. 문득 보니 산비탈에서 외삼촌과 누나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외삼촌은 어깨에 나무 한 짐을 얹었고 누나는 행여 무거울까 한손으로 나뭇짐을 받치고 뒤따르고 있었다. 어비딸의 그 풍경이 아름다웠다. 누나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고 효성도 예뻐 보였다.

나는 오줌 누는 걸 잊고 어비달이 내려오는 비탈길로 들어섰다. 아름드리 밤나무가 하나 서 있어 한창 낙엽이 날려 수북이 덮여 있고 서리가 녹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밤나무 아래 서자 가까이 온 어비딸이 웃었다.

왜 나와 있어? 외삼촌이 물었고 나는 대답할 말이 궁해 그냥 집에 갈라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말없이 그 뒤를 발맘발맘 걷는데 누나가 외삼촌과 떨어져 뒤처졌다.

너는 왜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오니?

나는 또 대답이 궁해 머뭇거리다 갑자기 빛을 본 것처럼 생각이 환해졌다.

그럼 누난 왜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와요? 나훈아 형도 몇 번 놀러왔댔는데...

이번엔 누나가 대답할 말이 궁해 히히히 웃었다.

그럼 앞으로 자주 놀러 와야 해 응?

누나가 다짐을 받듯 눈을 쫑긋하며 말했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속으로 생각했다. 외가에는 이제 앞으로 오지 않을 테요. 원래도 안 오던 걸 뭐. 예쁜 누나가 시집을 가 버리고 없는데 왜 오겠어요.

 

집터서리에 다 와서야 나는 절박감으로 입을 열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던 것이었다.

누나 이름이 뭐예요?

누나가 황당한 표정으로 씽긋 웃었다.

어머 얘, 넌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니? 얘좀봐.

누나가 가르쳐 준 이름은 그 궁벽한 산촌에, 시골처녀에 딱 걸맞는 정말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때. 삼순이만 아니면 됐지.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고 갑툭튀 누나와의 유일한 기억이었다.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했을 뿐더러 그 소식 한 점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누나를 애모한 건 사실이지만 이성으로써의 그것은 아니다. 청춘의 한때, 연애감정이 궁박한 시절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고 그가 누구이든 준비 없이 맞닥뜨린 오묘한 상황에 나는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가슴 뛰는 혼란!

설마 내가 서양 놈들의 비윤리적인 모럴을 흉내라도 낼까. 단지 사촌지간인 알리사와 제롬의 연애가 불현듯 떠올라 슬쩍 대비시켜 본 것뿐이다.

이제 누나도 60이 넘었을 것이다. 그 여리고 얄상한 자태는 진즉에 사라져 버렸을 테고.

 

 

옛 청춘시절을 끄집어내어 회상할 때 동반으로 따라오는 노래가 있다. 김학래의 <슬픔의 심로>와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 송이>,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이다. 한창 꽃으로 피어나려 하는 그 시절의 노래들은 평생을 지배하는 것 같다. 당시 김학래와 김수철은 새로운 라이벌 구도로 대단한 선풍이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오래 가지 않았다. 김학래는 슬픔의 심로를 절정으로 이후 크게 히트한 노래 없이 조용히 뒤안길로 물러났다. 유명 연예인과의 추문이 인생의 발목을 잡았다.

이 노래의 가사를 누나의 낙서장에서 보았지만 이미 그 전에 내 몸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누나와의 추억은 별개의 이야기다.


         김학래 : 슬픔의 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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