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선암사는 언제나 음울한 이미지로 박혀 있다.
고색창연한 여느 사찰과 달리 벗겨진 단청 그대로 두어 폐가처럼 느껴지는 절집의 기운도 그러려니와 그것보다는 작가 조정래의 탄생지라는 내력 때문일 것이다.
내막이야 차치하고 절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한 사람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정호승 시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눈물이 나면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라는 시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내게 선암사는 그래서 늘 음울하고 비창한 곳이다.
선암사 홍매가 피었을까.
봄기운은 충분히 무르익었지만 응향각 옆 홍매는 꽃잎이 얼어 버릴까 염려인지 시방은 묵언수행하듯 웅크리고 있었다.
저쪽 부산은 도심에도 홍매가 활짝 틔었더만 오히려 더 남쪽인데도 산곡이라서 더 늦는 모양이다. 그래도 꽃망울은 잔뜩 부풀어 비 한번 맞으면 툭툭 터질 듯하다. 바야흐로 흥분의 시기가 코앞이다.
그래도 철은 철이라 ‘여보쇼들, 지도 있지라’ 하듯 청매화 꽃잎들이 여기저기 터지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화신은 이것으로 족하다.
해우소에 가서 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남의 똥이나 구경한다고 들여다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뿐이다.
울고 싶어 도시서 선암사 먼 길을 가는 동안 서글픔은 시나브로 사라졌을 테고, 혹은 가면서 이미 충분히 울어 더 이상 눈물은 없을 테니 선암사에 와서는 정결한 마음으로 부처님 얼굴이나 한번 보고 차나 한 잔 마시며 가뿐하게 돌아가라는, 시인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울든 웃든 고적한 도량에 들어서면 잠시지만 마음이 고즈넉이 가라앉으니 불자가 아닌 나도 이런 절집을 찾아가는 길이 마냥 즐겁다.
더구나 겨울이 지나 화사한 봄날이 바투 다가와 있는 이런 날들은 기분이 사뭇 설레지 않겠는가.
승선교 아래로는 이미 겨울이 녹아 봄이 흐르고 있었다.
수정식당에 시가 표구되어 걸려 있다.
그리 살 수 있다면, 그리 살다가 바람으로 떠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지고지락은 없을 터.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그저 꽃잎 하나 벌어질 때마다 탄성을 지르는 소년의 감성으로 단 한 철만 살아도 여한은 없을 것을.
숲에서 보내는 편지
여기는 집세를 받지 않으니
언제라도, 누구라도
들어와 사시라
여기는 어떠한 조건도 이유도 묻지 않으니
언제라도, 누구라도
들어와 사시라
나무도 좋고 동물도 좋고 풀도 좋고
바람도 좋고 구름도 좋고 비도 좋으니
년년세세 알콩달콩 살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시라
땅세도 전세도 월세도 없으니
마음에 그리는 집 지어놓고
세세년년 얼크렁설크렁 어우러지다
마음 편안하게 구름으로 떠나시라
바람으로 떠나시라
김기홍
쇼팽 : 봄의 왈츠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0) | 2019.03.23 |
---|---|
냉정과 동정 사이 (0) | 2019.03.12 |
흙사랑, 두부를 쑤다 (0) | 2019.02.15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0) | 2019.01.18 |
대구 수성못 (0) | 2019.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