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연주회에 가면 우리는 또다른 출연자를 본다. 페이지 터너(Page Turner)다. 페이지를 넘겨준다는 의미 그대로 연주자의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다.
연주자는 당연 그렇겠지만 연주회에서의 페이지 터너도 그에 못지않게 극도로 긴장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녀의 조그마한 실수 하나가 연주회를 망칠 수가 있다.
무대 위에 같이 출연하지만 그들은 존재감이 있으면 안 된다. 우선 의상이 튀지 않아야 한다. 주로 검은색 옷을 입고 일체의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무대에 입장할 때 연주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를 따른다. 관객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연주장의 분위기에 따른 표정도 짓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림자여야 한다. 그녀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연주자를 위해서다. 악보는 왼손으로 넘기고 연주자의 몸에 손이나 옷 등이 스치지 않도록 한다.
이 페이지 터너도 엄연히 연주회의 일원이다. 당연 음악적 소양과 재능이 있어야 한다. 연주는 피아니스트가 하지만 그녀의 능력에 따라 연주의 성패가 갈린다고 한다.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골퍼와 캐디 같은 관계가 아닐까 한다. 연주자와 똑같이 긴장과 부담을 가지면서도 주목과 관심은 받지 못하는 극한 직업이라 누구도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다만 공연기획자나 연주자와의 친분 등의 사유로 무대에 앉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 전문 직업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페이지 터너가 출연하는 연주회엘 갈 때가 있다. 철저하게 그림자 같은 존재여야 하지만 관객들의 눈에 피아니스트 말고 그녀의 움직임이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그럴 때 눈에 거슬린다는 느낌도 있다.
어느 분야건 마찬가지지만 주인공이 화려하게 돋보이는 그 뒤에는 묵묵히 그를 빛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을 찬미한다는 건 마음에 없는 말이고 다만 어떤 일을 하든 그 사람의 가치가 폄하되지 않아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마인드를 지녀야겠다는.
어린이합주에서의 캐스터네츠나 트라이앵글처럼 말이다.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 2번 2악장 D.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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