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오지를 찾아 노숙비박으로 유랑하며 나달을 보낼 적에 무주 설천을 지나 삼도봉엘 오른 적이 있었다. 때는 만추라 온 산이 황금색으로 채색되어 있었고 오솔길에도 누런 낙엽송 이파리들이 깔려 진한 가을의 고적을 실감했었다. 삼도봉 정상까진 다 오르지 않고 숲 언저리에서 머물다 내려오긴 했지만 그때 인생의 덧없는 상념에 무척이나 쓸쓸하였다.
그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니!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지극할수록 가슴은 더 절절하게 슬퍼지는 경험이었다.
산을 내려오다가 문득 물한계곡이라는 바랜 길안내 팻말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한번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오후 햇덧이 조금 밖에 남지 않은 시각이기도 했고, 그보다는 이미 예정한 다른 곳으로의 여정이 있었기에 다음으로 미루었었다.
그리고 18년이 지났다. 어쩌다 한번씩 생각은 났지만 막상 찾아갈 계획은 없었다. 우연히 <물한리 만추>라는 가곡을 들으면서 드디어 결심을 굳혔었다. 그래 한번 가 보자. 다시금 옛 유랑시절의 그리움이 접신되듯 몸으로 들어왔다.
이왕이면 만추에 가자. 그러면서 가을을 기다렸다. 한 주를 더 앞서 가면 제대로 된 물한리의 만추를 만끽했을 테지만 오래 전에 이미 정기도보 진행이 잡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주를 늦춘 것인데 과연 때를 놓였다는 걸 깨달았다.
계곡은 이미 가을이 지쳐 겨울이 바투 다가온 듯하다. 등산로를 따라 어느 정도 오르니 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들이 파란 하늘에 걸려 있다.
숲은 온통 낙엽 천지다. 아 가을이다. 18년 전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만추의 감상이다. 그땐느 모든 게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하더니 지금은 안존하고 풍성한 감성이어서 상대적으로 감흥은 좀 약한 편이다.
나이가 이만큼 들어서일까. 아니면 동행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진우 씨가 모델이 돼 주었다.
음악과 문학에 관심과 조예가 있어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내가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인문 말고도 경제와 역사에도 깊은 지식과 상식을 지니고 있어 늘 얘깃거리가 풍부하다. 내가 주말이면 늘 여행을 떠나니 한 번 같이 가주지 않겠냐고 해 선뜻 그러자고 해서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 코드가 통하는 사람과의 여행은 어디라도 즐겁다.
덕분에 막걸리를 석 잔이나 마시고 기분 좋게 얼굴도 물들였다.
가을 햇덧은 무척이나 짧아 서둘러 일정을 마쳤는데도 괴산에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어둠에 묻혔다.
이제 내 여행지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운다. 물한계곡을 다시 갈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내 노트에는 가보지 않은 다른 곳으로의 여정이 길게 늘이어 적혀 있다. 그러므로 계곡을 내려올 때 백미러로 보이는 풍경이 내내 꼭뒤에 따라오던 것이었다.
그 해 가을 삼도봉 들머리에서.
아름다운 만추 풍경에 괜시리 눈물이 날듯 고적했었다.
황여정 시 이안삼 작곡 이현 노래 : 물한리 만추
물한리 굽이굽이 산자락 돌아가면
저문날 가을 햇살이 하얗게 피어난다
가을 낙엽송 가지마다 노을 곱게 물들면
억새풀 잠이든다
눈감고 조용히 어스름에 마른풀꽃
천년을 흘러도 변치않을 너의 숨결
아 깊은골 물한리 아름다운 가을산이여
아 깊은골 물한리 꿈을 꾸는 나의 노래여
어둠 깊어 적막은 달빛 타고 흐르는데
물소리 맴돌고 돌아 하얗게 부서진다
골짜기 굴러도 옥빛 푸른 미소지으며
깊어가는 가을밤 내 가슴에 별을 헤며 밤새 흐르네
천년을 흘러도 변치않을 너의 숨결
아 깊은골 물한리 아름다운 가을산이여
아 깊은골 물한리 꿈을 꾸는 나의 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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