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라도 갈 때마다 그 느낌은 매번 다르다. 여행을 하면서 알아지게 된 사실이다. 경복궁을 가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다르고 세분하여 1월, 2월이 다르고 3월이 또 다르다. 햇빛 청명한 날과 비오는 날의 느낌도 다르다.
그러니 평생을 같은 장소만 여행해도 갖가지 매력을 느낀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말은 공감할 수 없다.
영월이다.
정선의 이웃 고을이라 낯설지 않고 가끔은 찾아온 손님과 함께 다녀오기도 하고 다른 곳을 여행할 때 반드시 지나가는 경유지이기도 하다. 정선은 원시적인 이미지인데 반해 영월은 고금이 공존하는 그러면서 왠지 밝고 따뜻한 고장 같은 선입견이 있다. 한적하면서도 세련된 멋이 있기도 하다.
유명한 관광지는 딱 한 번씩 다녀왔었다. 이번에 다시 한 번 그곳들을 둘러보았다. 모든 곳이 두 번째 방문인 셈이다. 두 번째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동강이 있고, 천문대가 있고, 오랜 세월을 지내온 석회암동굴이 있고, 나이 어린 임금님의 슬픈 이야기기가 있고,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이 잠시 살았었고.
가슴 따뜻한 영화 <라디오스타>로 인해 더욱더 정감이 가는 고장. 청록다방의 미스 김이 보고 싶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론 국내에서 가장 여행다운 여행지라는 생각을 한다.
유명한 한반도 지형
선돌
동강
장릉
청령포
실은 영화 <라디오스타>의 배경인 옛 KBS영월방송국이 주목적지였다. 방송국이 폐쇄되고 지금은 ‘라디오스타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노래에 맞게 비오는 날이었으면 제격이었겠지만 하늘은 높고 여름인데도 가을날처럼 을씨년스럽게 청명한 날이었다.
<라디오스타>는 옛 연인과 유일하게 함께 본 영화였다. ‘영화 같은’ 설정 없이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소재로, 따뜻하게 그려낸 영화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이번에 그의 작품 <변산>이 개봉했다. 영화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은 기회를 만들어 보려 한다.
미스 김의 방송. 영화 <라디오스타>를 크게 흥행시킨 명장면이다.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미장센이고 명장면인 미스 김의 방송, 그녀의 청록다방. 청록다방 말고도 하나미용실 곰세탁소 사팔철물점 등 영화에 실제로 나오는 가게들이 있다.
한번은 영월역 앞 그린모텔에서 숙박한 적이 있었다. 객실에 뜬금없는 라디오가 한 대 있어서 주인이 참 취향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견 그럴듯한 발상이라고 깨단한다.
영화에도 나왔던 별마로천문대
별마로천문대에서 보는 영월읍
청록다방엘 들어간다.
시골다방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그러하다. 다방레지가 있고, 둘둘셋 비율로 탄 일명 ‘다방커피’가 있고, 구석자리 테이블 옆에 키싱구라미 서너 마리 떠다니는 수족관이 있고, 창가에 수국 화분이 있고, 그 창문 밖에는 노오란 오후의 햇볕이 내리고 있다.
햇볕도 무료하고 다방 안의 풍광도 무료한 오후다.
하릴없는 늙은이 선풍기 바람 독차지하고 앉아 레지에게 음탕한 농담 주절거리고,
오빠라고 부르며 해해거리니 정말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줄 알고 날마다 출근도장을 찍는 노인네도 있을 법하다. 모르긴 해도 그렇게 레지에게 사준 쌍화차 값만 해도 재산 반은 되리라.
아, 잊고 있었던 유엔성냥! 저것이 아직도 있다니. 옛날 건가 했더니 옆구리에 바코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계속 생산되고 있음을 알겠다.
저 성냥개비로 탑을 쌓으며 진종일 노닥거렸던 놈팡이들이 제법 있었다. 이 구절을 읽고 웃는 사람은 분명 그 부류였을 것이다.
청록다방이 그나마 다른 건 그래도 영화에 나왔다고 온 벽에 <라디오스타> 스틸 사진들이 붙어 있고 가끔 다녀가는 유명인들의 친필 방명록이 벽에 가득하다. 그 너저분한 사인들은 아마도 청록다방이 문 닫기 전에는 지워지지 않으리라.
낮더위도 졸고 있는 고즈넉한 오후. 다방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테이블에서 냉커피 한잔과 더불어 시간을 죽인다. 백수 같은 편안한 여유로움. 이 아련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어찌 폄하하리.
청록다방에 미스 김은 없었다.
영화에서 ‘이스트리버’, 즉 동강이란 이름의 밴드로 직접 출연한 노브레인. 노래 <비와 당신>의 원작자이지만 나는 박중훈이 부른 노래가 훨씬 좋다.
아련한 옛 추억처럼 평안하고 고즈넉한 영월 여행이었다.
방준석 작사 작곡 박중훈 노래 : 비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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