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오다.
4년 만에 재방문이다.
그때 목포역 대합실에서 브라질 월드컵 한국 첫 경기 러시아전을 보았었다.
다시 4년, 그 러시아에서 월드컵을 개최한다. 그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한국인들의 월드컵 열기는 미지근하다. 4년 전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올해는 남북회담과 북미회담 등의 대형 이슈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표팀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전력이 약한 건 탓할 수 없지만 약한 전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축구협회의 적폐가 씁쓸하다. 홍명보 신태용은?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그해 목포는 심연의 바다처럼 우울하고 무거웠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 슬픔은 도시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목울대를 건드린다.
시내버스는 모두 노란 리본을 차창에 붙여 넣었다.
하늘은 저리도 파랗고 청정한데...
이난영나무
삼학도에 이난영공원이 있다.
이난영
본명은 이옥례(李玉禮). 1616년 6월 6일 목포 양동에서 출생. 1933년 18살에 <시드는 청춘>으로 가요계 데뷔. 1935년 <목포의 눈물> 대히트로 불세출의 여가수 인생 시작. 1937년 22세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 1942년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동란 때 남편 월북. 1965년 4월 11일 서울 자택에서 40세의 나이 별세. 경기 파주시에 안장된 유해를 2006년 이곳 삼학도에 이장.
공원에 노래비와 함께 세워진 추모비에 담긴 그의 이력이다.
‘이난영나무’로 명명한 배롱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래 목포는 항구다.
항구라서 수탈과 굴욕의 역사를 가진 비운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의와 분노의 이율배반적 이데올로기를 함께 간직하고 때로는 분출해 내기도 한 영욕의 도시이다.
이난영은 일제강점기 오까랑꼬라는 예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런 전력과 남편이었던 김해송이 친일파였던 이유로 그녀에게도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남편이 월북하고 그녀의 뒷배를 봐준 이가 가수 남인수였는데 그가 이혼하고 나서 사실혼으로 1962년 남인수가 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지속하였다. 남인수 역시 골수 친일분자였고 <목포는 항구다>를 작사한 조명암 역시 대표적인 친일분자였다. 그러므로 정황상 그녀 역시 친일분자임은 명백해 보인다.
유달산에서 보는 삼학도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이난영 노래 : 목포는 항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