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만화가 방창하여 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세월에 난데없이 추위가 기습했다. <고향의 봄>이 탄생한 창원은 오래 전부터 이 계절에 한번 다녀오리라 별렀던 곳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펄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미 안날부터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고 기상청은 눈이 내리겠다고 예보한 바 있었다. 밤동안 박달산은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만개한 벚나무 가지에도 꽃잎에도 눈이 내렸다. 어느 게 꽃잎이고 눈송이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묘한 정취의 봄날이었다. 꽃잎도 날리고 눈송이도 날렸다.
고속도로에도 눈은 내리고 차창 밖은 매섭게 추웠다. 대구 근처에 이르면서 눈이 누꿈해지고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였다. 따뜻한 남쪽나라 창원도 이날만은 예외가 아니어서 하루 종일 을씨년스럽게 추웠다. 직접 차를 가지고 가는 요량으로 가벼운 옷으로 허술하게 입었다가 좀 떨기도 했다.
남녘은 이미 벚꽃이 지는 중이었다. 파랗게 잎이 돋고 있었다. 인고의 긴 시간을 기다려 꽃을 피우지만 지는 건 잠깐이다. 그것이 순리고 자연이니 억울할 것도 허망한 일도 아니다.
고향의봄도서관 뜰에는 개량종 붉은매화가 강렬했고 복사꽃 철쭉 동백이 한껏 저들의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고향의봄도서관’이라는 문학적인 이름이지만 여느 도서관보다 특별히 꽃들이 풍성하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도서관 지하층에 이원수문학관이 있다.
이원수는 유독 꽃과 식물에 대한 시가 많다. 우리는 그중에 <고향의 봄>만 알고 있다.
고향의 봄.
아리랑과 함께 남북을 막론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애창되고 있는 겨레 최고의 노래다. 어릴 때는 막연히 흥얼댔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참말 이 노래 곡조가 가장 아름다운 우리 노래임을 새삼 깨닫곤 한다.
아주 오래 전 이 노래의 탄생지인 창원을 소개하는 방송을 보고서 꼭 한번 가 보리라 했었다. 그때는 마창진이 통합되기 전이었다. 벌써 30여년 되는 것 같다. 비로소 여기 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마산 진해는 두어 번 갔었지만 창원은 처음이다, 통합 창원시가 됐으니 별 의미는 없지만.
고향의 봄 탄생지라고 해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울긋불긋 꽃대궐을 이루고 있을 거란 상상은 물론 안했다. 벌써 30여년이 지났고 창원은 곧 광역시가 될 거대한 문명도시다. 더구나 이 노래가 나온 지도 거의 한 세기가 되어 간다. 그냥 흔한 여느 대도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이라고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집에서 가까운 동문은 석벽이 남아 있었고 성문은 없었지만 성문을 드나드는 기분으로 다녔다. 동문 밖에 있는 미나리 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 노는 곳이 있어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아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 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나는 그런 그림 같은 경치 속에서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하고 이웃에 사는 동무 아이와 같이 즐겁게 놀며 자랐던 것이다.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
이원수가 살았던 소답리 마을엔 조각가 김종영 생가가 아직도 있다. 일대에서 그 가문의 부와 명성이 워낙 떠르르해서 그 집의 땅을 밟지 않고는 살수 없었다고 한다. 소년 이원수가 지은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대궐은 바로 이 김종영의 저택이라고 한다. 그때는 아마 울안팎으로 꽃잔치를 벌일 만큼 화려했던 것 같다. 지금은 세월을 먹고 낡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에는 관람객이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지금은 개방을 안해 대문이 잠겨 있다. 담 너머로 사진 몇 장 찍어 보았다.
이미 한 세기가 흐른 소답동은 그 시절의 흔적이 전혀 없다. 창원시가 ‘고향의봄길’이라고 이름을 지정한 길도 그냥 평범한 도시의 그것이고, ‘고향의 봄’이라는 이름과는 그 어떤 실낱도 없다.
고향의봄길. 길 이름과는 전혀 동떨어진 그냥 도시 시장길이다.
그리고 천주산.
전국에 진달래로 유명한 산이 여러 곳 있지만 이곳 천주산의 진달래도 가히 장관이다. 이원수에게 시의 영감을 주었던 산이다. 허구한 날 뛰어다니며 놀던 소답동의 뒷산. 그에겐 가슴 절절한 회한의 산이기도 했다.
‘나는 여섯 살, 누나는 아홉 살.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저녁때가 되어도 오시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가신 산은 멀리 바라다보이는 천주산이다. 하늘 같이 높고 땅덩이만큼 큰 산이었다’
내 어렸을 때도 아이들은 오지 않는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내용의 노래들을 많이 불렀었다. 그 노래들은 슬펐고 무서웠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은 대개 이런 어린 날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의 봄’ 노래가 이토록 가슴에 사무치는 것일 게다. 이원수의 또다른 절절한 회고중 하나는, 인근에 석광이 있었는데 가난한 집에 한 푼이라도 벌고자 그의 누나가 날마다 광산에 가서 돌을 캤다고 한다. 소녀들의 여린 손에 거칠게 굳은살이 박이는 것을 보며 어린 소년은 삶의 팍팍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 누나의 애상을 담은 시도 썼다.
갑자기 추워진 바람에 만개한 진달래 꽃잎이 죄다 시들고 있었다. 휴일이고 또 제철이라 주차장에서부터 등산로는 인파로 넘쳐 났다. 꽃송이보다 사람이 더 많다고 과장할 정도였다. 반산홍엽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봄철의 진달래산도 참으로 장관이다. 저 꽃무리속으로 뛰어들면 온몸에 금세 꽃물이 들 것 같은 진분홍의 바다였다. 저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만 느끼기만 할 뿐 소감 한 줄 쓰지 못하는 둔재의 비애만 원통할 뿐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예전에도 지금에도 이런 빼어난 자질을 가진 문학과 예술가들이 있어 그들의 글로써 대리만족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전에 포스팅한 바 있듯, 이원수 선생의 부인은 <오빠생각>의 노랫말을 지은 최순애다.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에 각각 예의 동시를 투고했던 인연으로 오랜 기간 펜팔로 사랑을 키우며 성인이 됐고 우여곡절이 있은 후 평생의 배필이 되었다.
이원수가 놀던 현 소답동을 배경으로 활짝 핀 복숭아꽃
내 사견은 노래 <고향의 봄>은 실은 노랫말보다는 멜로디가 명곡이라 생각한다. 나더러 지으라고 하면 감히 엄두도 못낼 시이지만 소비자의 눈으로 보면 그닥 빼어난 가사는 아니라는.
이원수 시 홍난파 작곡 조수미 노래 : 고향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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