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성공했다.
이제껏 보길도를 가려고 완도항엘 세 번 갔었는데 어찌도 그리 날을 잘 잡는지 매번 기상이 나쁘다고 여객선운항이 취소되어 있곤 했었다. 섬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3전4기, 이번에 비로소 나를 거부한 그 섬을 보았다.
여름이 시작된 이후 남쪽지방은 내내 폭염의 연속이었다. 태양열은 내리쬐고 대지는 찜통이다. 이렇게 맑고 무더우면 해상은 그 반대다. 물과 뭍의 기온 차이가 커 짙은 해무가 상시 바다를 덮고 있었다.
땅끝항을 떠나면서부터 이내 카페리는 안개 속에 휩싸였다. 아무 것도 뵈지 않는 것이 흡사 심연의 바다 깊숙이 내려간 듯했다. 이런 기상에서도 배는 꿋꿋이 물을 가르고 나아갔다. 제대로 가고 있기는 한가. 선장은 겁이 안 날까. 그는 베테랑인가. 세월호의 트라우마는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일상에 깊게 잠식해 들어와 있었다.
절망 같은 안개를 데리고 산양진항에 닿았다. 차를 끌어내어 낯선 섬을 달린다. 보길도가 아니고 노화도다. 이 섬에서 연육교를 건너야 보길도다.
전에는 완도항에서 노화도를 들려 보길도까지 직접 배가 들어갔으나 지금은 보길도로 가는 배가 없다. 해남 땅끝과 산양진간의 항로와 완도 화흥포와 동천항간의 항로 두 코스가 있다. 둘 다 노화도의 항이다. 보길도 여행자는 배에서 내려 한참을 이동해야 보길도로 간다. 보길대교가 생김으로써 보길도 항로는 폐쇄되었다.
관광객도 불편하지만 뭍으로 나가려는 보길도 주민들이 더 불편해졌다고 한다. 노화도로 건너가서 꽤 먼 거리를 가야 배를 타게 되어 있다.
관광객도 자기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멀어서 보길도 여행이 만만치 않다. 해운회사에서 일부러 보길도 항로를 없앴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쉽지 않으니 관광객들은 대개 차를 가지고 간다. 도선료는 비싸지 않지만 차 도선료가 비싸니 회사에서는 그 수입이 큰 것이다.
보길대교로 떨어지는 저녁 해.
앞에는 유리바다 뒤에는 첩첩옥산
속세가 아득해졌으니 마음이 청량도 하다
하늘이 나를 기다렸으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보길도는 윤선도요, 윤선도는 또 보길도다.
관직을 내려놓고 속세를 등지고자 찾은 곳이 제주도였다. 제주도로 가다가 우연히 섬을 하나 발견했고 목적지였던 제주도를 버리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섬은 원래 평지가 없지만 보길도의 한가운데 부용동은 천혜의 지리로 아늑한 동네다. 울릉도의 나리분지와 같은 지리다. 그야말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마을은 세상 근심 다 내려놓고 삶을 즐길만한 명당이다. 이곳에 거처를 정하여 눌러 살면서 윤선도는 자신만의 지상낙원을 가꾸었다. <어부사시사> 등 그의 빼어난 문학작품들의 산지다. 피어나는 연꽃과 같다 하여 부용동(芙蓉洞)이란 이름을 지었다.
낙서재 마루에서 보면 부용동 건너 안산이 보이고 그 중턱에 동천석실 터가 보인다. 낙서재 앞에 보이는 너럭바위는 귀암(龜岩)으로 윤선도가 올라앉아 달맞이하던 바위라고 한다.
낙서재
낙서재 마루에서 보는 귀암과 동천석실
보길도에는 황칠나무 농장이 많다.
곡수당. 고산의 아들 윤학관의 아들이 휴식차 거처하던 정자.
자 이젠 건너다보이는 동천석실로 간다. 동천석실(同天石室)은 신선이 산다는 유교의 가상세계이며 윤선도는 자신의 이상을 그려 이름 붙였다.
동천석실로 올라가는 숲엔 죄다 동백나무 군락이다. 청청한 이 여름도 좋지만 붉은 꽃 흐드러진 봄철에 온다면 그 아름답기가 과연 동천석실일 것임을 상상해 본다.
한 평 남짓의 조그만 정자다. 이곳에서 서책을 읽으며 글도 쓰고 파를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
차바위
여기서 보는 부용동은 과연 피어난 연꽃 같은 형상이다. 마을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고 아늑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이 바위 이름은 용두암. 두 바위 사이에 도르래를 설치하고 줄을 매어 건너편 본가와 연결을 했다고 한다. 동천석실에 기거하면서 음식이나 다른 필요한 것들을 줄에 매달아 보냈다고 한다.
참으로 부르주아적인 삶을 살았다. 속세와 명리를 떠났다고 우리들은 그의 청빈을 존경하겠지만 축재한 부(富)가 아니고서야 그러한 호사와 풍류를 누렸을까. 그런 문학작품들이 쓰였을까.
어부사시사
원림과 세연정
바다는 내내 안개에 둫여 있었다. 이 바다는 그 유명한 다도해해상공원이지만 아 저 안개가...
예송리에는 몽돌해수욕장이 있다.
이날이 7월 20일. 바캉스 시즌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일은 해수욕장을 개장하는 날입니다. 다시마를 널어놓으신 어민들께서는 오늘 속히 다 걷어 주시길 바랍니다. 연신 이장의 당부가 확성기로 흘러나온다.
유명한 곳이 전국에 여러 군데 있지만 이런 몽돌 해변은 보기는 좋지만 해수욕장으로서는 적합하지가 않다. 햇볕에 달궈진 돌이 엄청나게 뜨거워 화상입기 딱 좋다. 나도 이 사진을 찍으려고 엎드렸다가 불과 4~5초에 팔꿈치와 무릎이 벌겋게 익어 버렸다. 부적합한 게 아니고 위험한 것이다.
이 사진이 퍽 맘에 든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과 이은주가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맞춰 왈츠를 추는 장면의 그 배경을 닮았다. 영화에서는 발갛게 노을이 지고 있다.
그리고 섬을 떠나온다. 늘 그렇듯이 이것이 마지막 여행임을 자각한다. 이제 또다시 이곳을 올 기회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갈 곳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워삶더니 바다 위는 역시 안개로 가득 찼다. 또다시 갈 곳 몰라 헤매는 나그네 같은 심정이 된다. 아 자연은 이렇게 신비롭고 오묘하구나. 뭍과의 거리는 지척이지만 안개 저편에 감춰진 섬은 머나먼 절해고도 같은 곳이기도 하겠다.
나를 세 번이나 거부했던 섬. 그만큼 신비감을 높였던 그 섬. 내 인생 어느 편린 하나를 남겨두고 서서히 멀어져 왔다.
저쪽 어딘가에 있을 보이지 않는 섬 하나.
이병욱 작곡 어울림 노래 : 어부사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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