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매년 겨울이면 머나먼 해남 땅에서 겨울을 보내곤 했다. 어느 때는 일을 했고 어느 겨울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여관방에서 겨우내 뒹굴거리기도 했다. 혹독한 강원도의 겨울을 벗어난 무위도식의 날들은 남쪽으로 피한 간 여유로운 시간들이었다.
월 20만원의 여관방에서 뒹굴다가 같은 여관의 한 사내와 안정이 생겼다. 사내는 전의 나처럼 인근의 들판에서 배추 작업을 하는 경상도 사내였다. 날이 영하로 내려가 춥거나 비가 오면 일을 안 나갔다. 그런 날은 몇 군데 다방에 전화를 걸어 커피를 배달시켰다. 커피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아가씨들이 보고 싶은 거였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티켓은 아니고 아가씨에게 질펀한 음담패설이나 늘어놓고 운 좋으면 똥꼬가 보이도록 짧은 치마의 허벅지나 쓰다듬는 주제였다.
그럴 때 사내는 꼭 나를 불렀다. 제 딴엔 나를 생각해 초대하는 거지만 놈의 짓거리가 영 눈에 거슬려 실은 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뻔히 있는 줄 알고 오라하는데 거절할 말도 마땅히 없었다. 가면 인사치레로 그냥 커피나 서둘러 마시고 잠깐 앉아 있다가 오는 것이다. 어쩌다 한번은 예의상 커피 값을 내가 계산해 주고 오기도 했다. 그럴 때는 좀더 오래 앉아 노닥거리기도 하는데 그때 마땅히 나눌 이야깃거리도 없어 영혼 없는 질문만 하기 일쑤였다.
뭐러 이 먼 곳까지 왔어요? 어차피 다방일 할거면... 서울에서 왔다는 레지 아가씨였다. 그냥 하는 말이 서울이지 진짜로 어디서 왔는지 알게 뭐야. 대답할 말을 찾으려는지 잠깐 뜸들이다가 그네가 그런다.
먼 곳이니까요. 날 아는 사람이 없는 먼 땅으로 오고 싶었어요. 직업이 챙피해서가 아니라 익명성이 좋아요.
그런 말이 그네의 진짜 솔직한 속내인지는 모르나 일견 그럴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에 한번 우연히 들렀던 진해 제덕에서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죄를 짓고 이곳에 들어와 살면 쉽게 잡히지는 않겠구나. 그런 익명성을 보장해 주는 데가 더러 더러 있을 것이다. 되도록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뭐 그렇지만 아는 사람 없는 데로 와서 다방 레지를 하다보면 또 아는 사람들이 양산되지 않는가.
나에게도 해남이란 곳은 그런 먼 곳이었다. 이따금 멀리 바다 위 섬들이 즐비한 다도해 따위 사진에서나 보던, 평생 한번도 가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곳이었다.
그 지형부터가 이국적이다. 점점이 바다야 그렇다 치고 드넓은 들판이 그렇다. 들판이되 평평한 것도 아니고 산은 더욱 아닌 혹자는 비산비야(非山非野)라고 하는 낮은 구릉들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진 독특한 지형들 말이다.
처음엔 그 이국적인 풍광이 제법 좋았으나 한 철을 비비대고 있어 보니 참으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다. 다만 겨울이 따뜻하니 그것만은 제일이었다. 폭설이 내려도 한나절이면 다 녹아 없어지는 온난한 기후가 좋았다. 물론 겨울 뿐이지 그 외의 계절은 바닷가 특유의 고온다습 끈적끈적한 느낌이 산골촌놈한텐 맞갖지가 않은 것이다.
여기는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1번국도는 ‘신의주에서 목포’가 아니다. ‘목포에서 신의주’다. 2번국도는 목포에서 부산이다. 우리나라의 도로명명체계는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이다. 그러니까 호남고속도로는 광주에서 대전이고 7번국도는 부산이 시작이고 고성이 끝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쪽 끝, 그중에서도 서쪽 끝인 해남은 우리나라의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또한 남도여행 1번지로 각광받고 있기도 하다. ‘땅끝’이란 브랜드는 해남이란 곳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상징이다. 하사와 병장의 노래 <해남아가씨>도 그런대로 이곳의 느낌을 전해주는 것 같다.
여러 해 겨울을 지내면서 웬만한 명소는 한번 이상은 다 가 보았다. 산 설고 물 설은 예전의 신비함은 거의가 퇴색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곳으로 떠나기를 소망한다. 이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와 매력이 늘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땅끝에 서서
이동근 작사 작곡 하사와 병장 노래 : 해남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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