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황성 옛 터

설리숲 2017. 6. 22. 21:22

 

 주말에 비 예보가 있더니 아직 주말은 먼데 하루 종일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하다. 다른 지방 어디어디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는 뉴스도 나온다. 여행길에서의 비는 불편하지만 귀로가 막힐 정도로 큰비가 쏟아졌으면 했다. 영천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금호강도 수량이 적어 강이란 이름이 무색하다.

 

 

 

 

 

 

 <황성 옛터>는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라고 한다. 이전에도 대중가요는 있었지만 창가풍의 노래여서 가요라 하기에 미흡했고 그렇지 않으면 죄다 일본 등 외국 노래들을 번안한 것들이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대표적이다.

영천 조양공원 내에 영천문화원과 조양루가 있고 그 사이에 황성 옛터 노래비가 있다. 노랫말을 지은 왕평이 이곳 성내동 태생이라 한다.

 

 노래의 처음 제목은 <황성의 적, 荒城>으로 고려 서울이었던 개성 만월대가 배경이다. 거길 갈 수는 없으니 그냥 왕평의 고향인 이곳에라도 들러본다.

어릴 때 살았던 경북 청송에 그의 묘가 있으며 그 길목 어귀에도 노래비가 있다.

영천에서는 매년 10월에 왕평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영천에는 서원 등 고가들이 산재해 있어 과거 선비의 고장임을 일러준다. 그런데 명소 아닌 대부분의 곳은 사람들의 출입을 봉해 놓았다.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담장으로 넘겨다보는 건물과 뜨락이 휘휘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앞창에 그예 빗물이 달려든다. 그러나 오락가락 미친 년 오줌 싸듯 그게 다였다. 비는 보도블록만 살짝 적시고는 다시 가뭄 모드로 들어갔다.

 

 

 

 

 이애리수는 1932년 당시 5만 장의 음반을 팔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지만 22세 때 연희전문학교 학생 배동필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가수를 그만두었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동필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두 사람은 절망하여 손목 동맥을 끊어 동반자살을 기도했다. 이로 인해 남자의 집에서 허락했는데 이애리수가 가수라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일체 알게 하지 말 것과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2009년 작고할 때까지 대중들의 관심을 차단하고 철저하게 27녀의 어머니로 살았다. 맏아들조차 성인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후에 많은 가수들이 리바이벌할 만큼 명곡이지만 워낙 유서 깊은 노래라 이애리수 원곡의 음원은 희귀하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들의 한을 달래주고 어쩌고 하는 설명들이 곁들어지지만 이런 노래를 듣고 있으면 오히려 더 비감해져 울분과 비분강개의 힘마저 원천 봉쇄되지 않았을까.

 

 

 

 

 

 

 

왕평 작사 전수린작곡 이애리수 노래: 황성 엣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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