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이상 차를 안 쓰고 세워두고는 혹 배터리가 방전될까 염려되어 딱히 갈 데도 없으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올라앉았으니 어디든 가긴 가야겠다고 해서 진양호를 돌아보게 되었다.
짜장 봄이다. 이맘때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들이 죄다 피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동백 산수유 흰민들레 수양벚꽃.
매화는 이미 지고 있었다.
남인수 동상과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가 있다. 불세출의 가수로 칭송받고 있는 남인수는 이곳 진주 출신이다.
전략……노래는 가장 정직한 시대의 언어. 일제 강점기 박시춘(朴是春)과 짝을 이룬 ‘애수의 소야곡’으로 단숨에 명성을 거머쥐며 ‘울며 헤진 부산항’, ‘낙화유수’ 등을 불러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주었고, 광복의 환희가 넘칠 때는 ‘감격시대’를 합창하며 얼싸안고 춤추었다.…… 후략
노래비 뒷면에는 이와 같은 미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남인수는 친일분자였다. 그것도 적극적인 친일이었다. 비문에 언급한 박시춘과 더불어 일본천황을 찬양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조선인의 징병징용을 촉구하는 많은 노래들을 불렀다. 그 노래들은 작사가 조명암과 박시춘 그리고 남인수의 합작품들이다.
총독부의 식민통치방식은 직역봉공(職役奉公)이었다. 즉 개개인이 가진 직업과 재능으로 일본에 부역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서정주 노천명 등은 글로, 음악을 하는 홍난파 현제명 등은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은호 김기창 등은 그림으로 부역한 골수 친일인사다. 조명암 박시춘 남인수 백년설 등은 대중음악계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김기창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의 경우는 뽑아 올리면 줄줄이 그 친일인맥이 드러나는 감자줄기 같은 존재라고 한다. 진주성내 의기사의 논개 영정이 김은호의 작품이라는데 그 화풍이 조선이 아닌 일본의 여인 같은 영정이다.
1996년부터 진주시는 매년 남인수가요제를 열었으나 남인수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고 나서 2006년 명칭을 진주가요제로 바꿔 개최하다가 행사를 폐지했다.
이곳 진주도 전통적인 영남보수지역이라 그런가.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는 과거가 곳곳에 뿌리 깊게 산재해 있는 느낌이다.
남강이 무심하게 흘러간다.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 애수의 소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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