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에 망각의 나무라 불리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어
지친 영혼들은 그곳을 찾아
위안을 얻곤 하지
어느 날 나는
너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그 나무에서 잠들었다
너무 곤히 잠들었지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또다시 너를 생각했다
잠들자마자 너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잊어 버렸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을 모두 잊을 수 있는 도피처인 가상의 나무를 꿈꾸는 민중의 노래이다.
이탈리아에는 칸초네, 포르투갈에는 파두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라는 새로운 물결의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
60년대에서 70년대를 넘어가던 시기의 라틴 아메리카는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외국 거대 자본의 막강한 힘에 휘둘리며 경제적, 문화적인 종속이 심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또한 빈부의 격차를 비롯해 굳어져가는 사회적 모순과 여러 나라에 난립했던 군부 독재정권의 횡포로 인해 힘없는 민중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지니지 못한 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새로운 노래’라는 뜻을 지닌 누에바 칸시온은 라틴 아메리카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노래를 통해 되찾자는 기치를 내걸고, 강대국들의 착취와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얼룩진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 있는 음악가들에 의해 시작된 노래운동이자 민중을 대변하는 저항의 물결이었다.
누에바 칸시온은 이미 50년대부터 그 음악적인 자양분과 의식적인 기초가 마련되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룬 쿠바 혁명이 누에바 칸시온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되며, 음악적으로는 안데스 음악의 전통을 비롯한 민속 음악의 수집과 연구가 그 바탕이 되었다. 그 선구자는 아르헨티나의 아타왈파 유판키였으며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는 그것을 널리 대중화시킨 전도사였다. 이들은 민속음악의 발굴과 함께 전통에 기초를 둔 새로운 소재의 노래들을 만들었고, 그 노래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누에바 칸시온 세대의 가수들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에게 알려졌다.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말은 원래 칠레에서 열린 <제1회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음악축제에서 나왔고 이후 라틴 여러나라들은 이와 비슷한 이름의 음악제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1932년 칠레 산티아고 부근에서 난 빅토르 하라 (Victor Jara)는 비올레타 파라를 계승하는 혁명가였다. 노래는 단순히 오락의 기능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부패한 사회를 개혁시켜야 한다는 지론을 지녔다. 기타 하나만으로 그는 칠레 민중들이 꿈꾸는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점차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칠레 국민은 처음으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하는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했다. 민중의 승리였으나 그 흥분은 지극히 짧게 종말을 고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옌데 정권은 3년 만에 몰락했다. 쿠데타 세력은 처참하게 아옌데 대통령과 정부요인들을 참살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빅토르 하라도 보복의 숙청에서 화를 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빅토르의 시신을 토막을 내어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부인 조안 하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영국 태생의 발레리나였던 그녀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간신히 칠레를 탈출해 영국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조안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빅토르의 노래를 알렸고 칠레에서 벌어진 비극을 세상에 고발하였다.
대중음악가에 대한 탄압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우리는 김민기 양희은 등 이른바 포크 가수들에 대한 유신정권의 패악을 겪었다.
총칼은 정신을 억누르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리와 양심은 늘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다. 민주주의 만세.
빅토르 하라 : 망각나무의 노래
'서늘한 숲 > 음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리차 강변 (0) | 2017.03.16 |
---|---|
피아솔라 그리고 탱고 (0) | 2017.03.15 |
피의 일요일 (0) | 2017.03.08 |
평생 겨울 나그네였던 사람 슈베르트 (0) | 2017.03.06 |
별이 된 악기, 하프 (0) | 2017.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