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때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곤 했다. 그러나 미술시간을 몹시 싫어했다. 미술시간은 늘 준비물이 필요했다. 공작 공예 등 그날이 되면 준비물을 사야 하는데 가난한 집의 아이는 그걸 살 수가 없었다. 물론 이야기하면 사 주기는 했을 테지만 집안의 사정을 아는 어린 소년은 차마 매주 준비물 사게 돈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림을 그려도 도화지를 사야 했으니 미술시간은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이 아쉽기도 했다. 내가 만약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그 소질을 살려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했으리라는 생각을 그 후에 여러 번 했었다. 어쩌면 외국 유학을 다녀왔을지도 모른다는. 가끔 연예인들 캐리커처한 것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정말 잘 그렸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예 관심에서 사라지고 손을 놓게 되니 그 소질은 제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못 그린다.
내가 다닌 학교는 인문계고등학교여서 학업성적에 모든 걸 거는 학교였다. 당시는 서울대에 몇 명 진학시켰느냐가 명문고교의 기준이었다. 아침 7시에 등교하여 밤 10시에 하교하였다. 도시락은 매일 두 개씩 준비하였다. 이런 학교에 정이 붙을 수 있을까. 내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다.
물론 시간표는 국영수 외에도 체육도 있었고 음악 미술도 있었다. 학교 당국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예체능 과목을 편성했지만 그 시간이 아까웠을 법도 하다.
나는 예체능 시간이 좋았다. 특별히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그 수업은 좀더 자유로웠다. 시간 내내 집중해서 수업을 해야 하는 여느 과목보다 음악 미술 등은 머리를 안 써도 되니 참으로 여유로웠다.
미술선생님은 최홍원 선생님이었다. 화단에서는 그런대로 중견 화가인 걸로 아는데 그건 나중에 안 일이고 우리에게는 단지 미술교사였다. 선생님은 수업에 항상 카세트를 들고 들어왔다. 미술수업의 시작은 클래식 공부였다.
- 오늘 소개할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입니다.
비발디와 그 음악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하고는 카세트를 틀었다. 비발디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성적지상주의의 인문계학교에서 이런 정경은 비약하자면 종교의 이단 같은 거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은 지루하고 짜증나는 음악이었을 테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은 한 학기 내내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다. 나 역시 클래식은 싫어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지루한 기억만 있었지 그때 들었던 곡이 어떤 곡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딱 한번 클래식이 아닌 비틀즈 음악을 틀어 주었다. 다른 때보다 좀더 길게 비틀즈에 대해서 설명을 했었는데 그것 역시 기억이 안 난다. 내가 팝 음악에 빠지기 바로 직전이라 비틀즈라는 전설적인 그룹을 그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했을 때였다. 난생 처음 비틀즈라는 이름을 들은 게 그때였고, 그해 늦가을 존 레논이 피살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때 비틀즈라는 그룹에 호기심이 생겼고 노래에도 관심이 갔다. 아, 그 충격이란! 미술시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런 대단한 가수를 진작 모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팝음악에 깊이 빠져 들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화려한 무대매너 그리고 매력적인 목소리, 올리비아 뉴튼존의 빼어난 미모와 아름다운 노래들.
클래식을 사랑하는 미술선생님이 왜 뜬금없이 비틀즈를 들고 왔는가는 훨씬 나중에 깨달았다. 비틀즈는 대중음악인이었지만 정통 클래식과 통하고 있었다. 그들의 노래에서 전자악기나 드럼을 제거하고 멜로디만 취해 듣는다면 그 흐름이나 곡의 진행이 정통 클래식에 아주 가까운 품격이 느껴지는 것이다. 폴 매카트니를 천재라 일컬은 것도 그제는 깨달아지는 것이다.
실제로 비틀즈 음악들은 후에 많은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곤 했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명연주곡이 되었다.
클래식 애호가인 미술선생님에게도 비틀즈는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고급음악이었던 것이다.
나는 최홍원 선생님의 수업방식을 존경한다. 아이들이 음악을 잘 몰라 지루해하긴 했지만 음악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감성을 풍성하게 해준다. 그 수업시간들은 아마 우리들에게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 믿는다. 돌아보면 순수하고 센스 있는 발상이었다. 어쩌면 내개 학창시절을 통틀어 존경하는 유일한 선생님이지 않나 싶다.
모든 예술은 서로 통한다. 미술과 음악이 별개가 아니고 사진과 건축이 별개가 아니다. 그 근본은 하나로 연결되어 그 최종 미의 가치는 하나다. 미술을 하며 듣는 음악은 최고의 행복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예언 하나가 있었다.
- 네 마리의 딱정벌레가 세상을 뒤흔들 것이다 -
물론 비틀즈의 출현을 예언하건 아닐 것이다. 비틀즈는 그 예언에 따라 자신들이 그것을 실현시키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들은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불세출의 전설이 되었다.
로얄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Let It 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