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비목>의 작곡자 장일남은 해주 태생이다. 5·25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의 금반지 하나를 가지고 극적으로 탈출하였는데 이남이 아닌 연평도였다. 섬에서 1년여를 지내면서 한 문학청년을 사귀었다. 어느 날 이 청년은 한 고서를 들고 왔는데 내용은 옛 우리말로 된 서책이었다. 그 중에 시 한 수를 보고는 자신의 처지와 동병상련의 감상을 느껴 곡을 지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제주도의 한 청년이 섬 생활에 염증을 느껴 뭍으로 나가기를 꿈꾸다가 드디어 섬을 떠나 살게 된 곳이 목포였다. 그러나 타관살이 역시 만만한 게 아니어서 향수를 달래며 유달산에 올라 바다 건너 제주를 그리워했다. 더구나 섬에는 두고 온 연인이 있어 그 애틋함은 더 했다.
제주도에 남은 여인 역시 일출봉에 올라 떠나간 애인을 그리는 나날을 보낸다.
대충 이런 내용인데 작자도 알 수 없는 시는 제주도 방언으로 씌어 있어서 대충 감으로만 그 내용을 감지하고 지극히 감상적인 노래를 지었다. 유명한 <기다리는 마음>의 탄생 배경이다.
그 후 60년대 말에 MBC에서 신작 가곡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그 주관자가 앞서 포스팅했던 천재 시인 김민부였다. 김민부는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었다. 김민부의 의뢰를 받고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다리는 마음>의 악보를 넘겼다.
물론 가사는 없는 노래였다. 가사를 부탁하여 연평도에서 베낀 시를 적어 주었는데 김 시인은 제주도 방언을 능숙하게 해독하여 걸작 노랫말을 지어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곡이 완성되었다는 것인데 노래의 가사는 엄밀하게는 김민부의 원작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음악에서 편곡도 제2의 창작이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의 내용을 명쾌하게 세상에 드러내 놓은 것도 재창작이니 김민부의 창작물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자 미상에 ‘김민부 번안시’다.
"김민부는 서정적 문체의 인기 방송작가였다. 그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감성적 문인이었다. 그래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는 자신이 늘 불만이었다. 스스로 ‘문학의 오발탄’이라며 생계를 위한 생활을 마뜩찮아 했다.
당시만 해도 동양방송 건물은 서소문 일대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직원들은 누구나 넥타이에 단정한 정장이었다. 그러나 김민부는 검은 피부에 검정물 들인 작업복 차림으로, 머리는 빗질 없는 산발에 가까웠다. 과묵한 그이 외모는 영락없는 기인 행색이었다. 당시 그가 고뇌하던 내면의 갈등과 저항의식이 외모로 환치되었던 것 같다."
- 한명희 <우리 가곡 이야기, 2009> 중에서
가을은
김민부
가을은
들메뚜기의 비취(翡翠)빛 눈망울 속에
등(燈)불을 켠다
가을은 죽은 가랑잎을 갉는
들쥐에 어금니에 번쩍거린다.
가을은 묘비(墓碑)를 적시는
몇 줄기 비로 내려서……
이 하룻밤
이 슬픈 외도(外道)에
욱씬거리는
통증으로
온다
김민부는 부산 태생이다. 부산 초량동 산복도로에는 김민부전망대가 있다. 가을에 한번 가 보고는 싶은데 어떨지.
<기다리는 마음>은 가곡인데 엄정행의 노래같이 인식되어 있다. 이 노래만큼은 과연 엄정행이 최고인 것 같다.
김민부 작사 장일남 작곡 엄정행 노래 :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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