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음악가 채동선은 보성 벌교에서 탄생했다.
선생의 부친은 근동에서 뜨르르한 갑부여서 현재 벌교읍의 대부분의 땅이 그 분의 재산이었다고 한다.
이런 집안의 후광으로 어렵지 않게 음악공부를 했고 독일 유학도 다녀왔다. 홍난파는 그의 바이올린 스승이었다. 선생의 업적은 위대하다. 한국 최초의 실내악단을 창단했고, 독창곡(당시에는 가곡이 아닌 독창곡이라 했다), 교향곡, 합창곡, 기악곡 등을 창작하여 한국서양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전통음악 함양에 힘을 써 민족주의음악가들을 모아 고려음악협회를 만들었다. 국악을 연구하고 민중들 속에 퍼져있는 민요를 발굴해 새로 악보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이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일제에 항거하여 삼일운동에 참가하였고, 창씨개명에 불응하여 이후로 은둔생활을 하였다. 당시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던 현제명 홍난파 등의 적극적인 친일행태에 회의를 느껴 벌교의 땅을 팔아 서울 수유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신의 스승이었던 홍난파로부터 받은 충격이 꽤나 컸을 것이다. 수유리에서 일체 활동을 끊고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늘 하얀 조선옷에 고무신을 신고 지냈다. 이런 행적들로 선생을 민족음악가로 부른다.
광복이 되고 다시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여 각종 문화단체나 음악에 관련된 주요업무를 맡으면서 우리 음악을 보전하고 다듬었다.
선생은 6·25 전쟁 중 피란지인 부산에서 작고하였다.
벌교에 채동선음악당이 있다.
음악사적 업적에 비해 자료가 풍부하지 않아 전시관은 조촐하여 규모가 크지 않다. 실내등을 켜두지 않아 들어서면 어두침침하니 납골당 같다. 출입문에 자동센서가 있어 사람이 들어서면 일단 불은 켜지는데 잠시 둘러보려면 이내 컴컴하게 꺼지고 만다. 이런 불만은 몇 년 전부터 있었던 걸로 아는데 아직 개선이 안 돼 있다.
마침 내가 갔던 날은 음악당 공연장에서 영화 상연을 하는 날이었다. 보통 영화관이 없는 시골에서는 주민들의 문화함양을 위해 정기적으로 개봉영화를 무료로 상여해 준다. 내가 갔던 날은 매달 한번씩 상영하는 바로 그날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채동선 전시관이 생각보다 미흡해서 실망을 하던 차에 영화라도 봐야겠다 생각했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 공포분위기나 참혹한 장면 등이 워낙 강렬한지라 내 관심사인 음악은 하나도 귀담아 듣지 못했다. 극중에 김환희가 오카리나를 갖고 놀면서 어설프게 부는 장면이 있어 어쩐지 반갑긴 했다.
채동선 편곡 조수미 노래 : 새야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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