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은 벌교에 있는 야산이다.
시인 박기동은 아버지가 한의사여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으며 14살 때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우리말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았다.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귀국하여 교편을 잡으면서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시 <부용산>으로 인해 좌경 빨갱이로 낙인 찍혀 평생을 굴곡진 삶을 살았다. 여수 출신인 시인은 10살 때 벌교로 이사했다.
<부용산은> 18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여동생 박영애가 폐결핵으로 요절하자 시집 식구와 함께 부용산에 묻었다. 사랑하는 누이동생을 잃은 비통과 애절함으로 지은 시가 부용산이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ㅡ박기동 산문집『부용산』(삶과꿈, 2002)
좌경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 시가 박해를 받은 곡절이 있다. 누이동생을 묻고 시인은 벌교에서 목포로 옮겨 항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교에 김정희라는 뛰어난 수재가 있어 모든 선생과 학생들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문학적 소양이 매우 뛰어났다 하는데 천재요절의 운명인지 16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나 그를 아꼈던 교사 안성현이 동료교사인 박기동의 시로 노래를 만들었다. 안성현은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사람이다.
이 노래는 당시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나중에 안성현이 월북하자 이 시와 노래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공식적으로 금지곡 리스트엔 오르지 않았지만 반공이데올로기에 민감한 세태라 사람들은 더이상 내놓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박기동은 빨갱이로 낙인 찍혔다. 이후로 반공정부의 온갖 감시와 박해로 평생을 살았다. 소중한 우리말로 글 한 줄 쓰지 못하는 비운의 시인이었다. 이 금지곡 아닌 금지 노래는 민중들 속에서 은밀하게 전파되었다. 빨치산들이 혁명가로 불렀으며 비전향 장기수들이 감옥에서 불렀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즐겨 애창하였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권의 노래로 이어지기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졌다. 50여년을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지만 생명이 이어졌다.
내 운명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토록 서정적인, 누이동생을 잃은 아픔의 시가 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불온시가 되면서 시인의 인생도 어긋나 버렸다. 박기동은 조국을 떠나 호주로 이민하였다. 80년대 후반 해금의 시류를 타고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떠돌던 노래가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원래는 1절만 있던 노랫말이었다가 호주에서 시인이 다시 2절을 지어 첨가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안치환이 처음으로 공식 발표하였다. 부용산에서 바라본 벌교만 다시 찾아온 벌교. 그 부용산엘 올랐다. 폭염이 맹위를 떨치는 중복날이다. 얕은 산이지만 가만히 서 있기도 괴로운 오후 나절에 오르는 건 죽을 맛이었다. 부용산은 아름답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흔한 야산이다. 그래도 구구절절 사연이 있다는 생각이어서인지 왠지 신성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어딘가 누이동생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무심해 보이는 벌교만도 그렇다.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의 태생지이기도 하다. 우리 아픈 현대사의 상징적인 고장이다. 금융조합 홍교 홍교에서 바라본 부용산
다시 벌교에 와서
고운기
부용산 오리 길에 그늘이 지네
사람은 가도 노래가 있어
좀체 사라지지 않는
땅의 역사를 그대 아는가
벌교천 따라 흐르는
밀물이 담아 온
좀체 사라지지 않는
바다의 역사를 그대 믿는가
들몰 들녘으로
저녁 먹으러 가는 기러기
우리도 바짓가랑이 흙을 털고
매운 솔가지 피워 밥 짓는
어머니 만나러 가자
제석산 부엉이 울음에 두렵던
옛 밤이 깊어지고
낮은 지붕 밑 등불 아래
검붉은 얼굴 맞대 먼 이야기
피워내면 사윈 밤이
새벽을 걷는 소리 그대 듣는가
박기동 시 안성현 작곡 안치환 노래 : 부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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