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앵두 꽃잎 날리던 날들

설리숲 2016. 4. 8. 23:09


 

  모내기할 때는 개흙에 박은 발이 시렸어도 날은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어느새 낮으로 푹푹 찐다. 모를 냈으니 일단 큰 일 하나는 끝냈고 여자들은 뽕잎을 따 들였다. 누에도 벌써 한 잠을 자고 부쩍 크고 있었다. 아이들은 뽕나무마다 돌아다니며 오디를 따 먹었다. 손바닥과 입가가 하루 종일 시커멓게 물들어 있곤 했다. 다니면서 아무데나 주저앉아 까만 똥을 쌌다.

 

  진땀이 흐리게 물쿤 날엔 그저 마루에 벌러덩 누워 보꾹만 쳐다보고 있으면 좋았다. 제비들은 연신 먹이들을 물고 드나들었고 마루에는 놈들이 갈겨 댄 똥이 너저분했다.

  마루에는 샛문을 열어 놓아 맞바람이 지나가면 그 시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럴 때마다 샛문으로 내다보이는 뒤란의 앵두나무에서는 하얀 꽃잎이 날리었다.

  봄도 아닌 여름도 아닌, 사람의 저 아래 감성을 건드리는 날들이었다. 대여섯 살 꼬마도 싱숭생숭하게 하던 앵두나무 낙화. 그 화려하고 슬픔이던 기억. 무르익은 화려한 봄날의 기억보다 내 유년시절은 분분히 날리던 그 앵두꽃잎이 가장 눈에 선하다.

 

 

   미워도 한 세상 좋아도 한 세상

   마음을 달래며 웃으며 살리라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온 사나이는

   구름 머무는 고향 땅에서 너와 함께 살리라

 

  그렇게 누워 뒹굴 때 라디오에서는 나훈아의 노래가 나오곤 했다. 그 당시 가수도 여럿 있었을 테고 노래도 많이 있었을 텐데 아무리 기억을 하려 해도 나는 나훈아 문주란 이미자 세 사람의 노래만 들은 것 같으니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

 

  오디가 끝물이 돼 가면 그젠 또 앵두가 한물이었다. 누가 먹거나 말거나 마루에는 날마다 빨간 앵두가 담긴 보시기가 놓여 있었고 물러지면 그냥 버렸다. 파리를 잡으려고 접시에 약을 섞은 밥알을 놓아두어서 거기에 앉았던 파리들이 앵두에도 날아와 앉았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그런 것에는 별 아랑곳 하지 않고 집어 먹곤 하였다.

  그러면서 계절은 이글거리는 여름으로 치달았다.



창경궁 명정문 앞뜰에 탐스럽게 앵두가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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