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에 비로소 산골사람들은 진정 사는 것처럼 산다. 아직은 양식이 떨어지기 전이라 먹는 것에도 주렵지 않았다. 강원도 깊은 산골은 농한기가 길었다. 사랑방에 모여 화투를 치거나 또는 막걸리 추렴을 했고, 올무나 창애를 놓아 꿩이나 토끼를 잡았다.
긴 농한기를 판판 놀기만 하지는 않는다. 저녁이면 늦은 밤까지 새끼도 꼬았고 우리 아버지는 기직을 짰다. 아버지의 기직 솜씨는 제법 정평이 나 있어서 읍에 내다 팔면 값을 더 받는다고 했다. 겨울에 부업이 아닌 주업으로 아버지는 밤늦도록 고드랫돌을 딸가닥거렸다.
기직은 우리 시골의 전통 방 자리로 재료는 왕골이다. 내 유년시절에 조금씩 도시의 문물이 스며들기 시작해서 나일론 제품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한 집 한 집 기직을 걷어내고 비닐장판을 깔기 시작했다. 비닐장판은 무언중에 개명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어쩌다가 장판을 깐 집에 놀러 가면 특유의 장판냄새가 코를 자극하곤 했는데 과히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방구들은 절절 끓어 뜨거운데 그 위에 장판을 깔았으니 냄새가 아니 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장판 깐 그 집이 여전히 기직을 깐 우리 집보다 잘 사는 것 같아 몹시 선망이 일곤 했다.
장난이 일상인 아이들이라 기직 깐 방에서 내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놀곤 했는데 엄마는 무릎 해진다고 기어 다니지 못하게 지청구를 해댔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은 항상 무릎이나 팔꿈치가 먼저 해져 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때로는 기직에서 가시가 일어 무릎에 박히기도 하였다. 그러니 빤질빤질한 장판이 어린 눈에는 꽤나 부러웠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짠 기직이 아직도 집에 두 장 보관되어 있다.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 때나 명절 차례 지낼 때 반드시 내어 놓고 한 장은 벽에 세우고 한 장은 바닥에 까는 실용품인 것이다. 벌써 50년이 다 돼 가는 나름의 격조 있는 물건이다. 처음에 쥐가 쏠아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조차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백년은 더 쓸 것 같이 상태도 아주 좋다.
큰형이 장가를 들고 첫 조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손녀딸이 좋아 기직 짜는 방에 아기를 눕혀 놓기를 원했다. 딸그락거리며 기직을 짜다가 무시로 돌아앉아서는 손녀를 들여다보며 어르고 만지고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무뚝뚝한 양반이 손녀에게는 그토록 오사바사했는데 고드랫돌 딸깍거리는 소리가 제법 시끄러웠을 텐데도 그 속에서 아기는 새근새근 잠도 잘 잤다.
나중에 아버지가 논에서 쓰러져 돌아가셨을 때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이 손녀딸이었음을 미루어 두 조손간의 정의가 예사롭지는 않았다고 짐작한다.
기직은 아니고 멍석을 짜는 사진이다. 고드랫돌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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