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셀렘민트와 진로소주

설리숲 2016. 3. 13. 00:43

 

 인총이 적은 산골 마을에 가게가 있을 리 없다. 학교 앞에 아이들 문구 파는 집이 있었고 아마 거기서 과자 등속을 팔았을 테지만 난 한 번도 거길 가본 적이 없었다. 대여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학교가 먼 거리였다. 그러므로 학교 근처는 물론 아이들의 선망인 과자 사탕들이 동화 속 궁전처럼 산더미로 쌓여 있을 것 같은 그 가게는 먼발치로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나중에 갔을 때 학교는 정말 코앞인 양 가까운 거리임을 알았다. 그때는 명성학교도 폐교가 되고 따라서 예전 가게였음직한 집도 텅 빈 폐가가 돼 있었다.

 

 그 가게 말고 방앗간 집에서도 물건들을 팔았다. 촌사람들도 가끔은 군것질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방앗간 집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했을 것이다. 우리 집서 골안으로 가는 길에 함박골에서 졸졸 흘러내려오는 실개천이 있었다. 우리는 게서 물을 길어왔다. 방앗간은 그 실개천 옆에 있었다. 산골 마을에서 우리 집과는 제일 가까운 셈이었다. 인총도 없는 가난한 산골이니 방앗간이 풍요할 리는 없었을 텐데도 내 기억으론 그곳을 지날 때면 늘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고 그 집은 왠지 부잣집 같이 느껴졌다.

 그 집 딸이 옥자였다. 사람들은 방앗간이라 하지 않고 옥자네 집이라 했고, 그 아버지를 방아재이라고 했다. 옥자 누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큰애기였다. 버덩에 나가 돈을 벌다가 시집을 갔기 때문에 내 유년시절에 그녀를 본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그 집에서 몇몇 필수품과 과자 소주 등을 떼어다 팔았다. 버젓하게 가게를 차려 놓은 것도 아니고 물건들을 벽장에다 두고 누가 와서 뭘 달라 하면 주섬주섬 한참을 뒤적거려 내주었다. 사과도 있었고, 아탕도 있었고, 까까도 있었고, 끔도 있었다. 어린 소견으로도 그 벽장엔 학교 앞 가게처럼 풍성하게 들어있는 것 같진 않았다.

 

 

 지금 기억으로 끔이 생각난다. 끔도 한가지 밖에 없었다. 셀렘민트였는데 당시는 납작한 끔이 아니라 궐련처럼 동그란 모양이었다. 어쩌다 셀렘민트 하나 생기면 아이들은 우선 손가락 사이에 끼고 어른처럼 담배 피는 시늉을 하다가 까먹었다. 단물이 다 빠지고 떠름하게 밍밍한 그것을 아이들은 하루 종일 씹고 다녔다. 밥을 먹을 때 뱉어 바람벽에다 붙였다가는 또 씹었다. 집집마다 방 벽은 아주 가관이었다. 때가 타서 거뭇거뭇한 벽에 아이들이 끔을 떼어낸 자리가 하얗게 벗겨져 한 면이 어루룽더루룽했다. 그렇게 여러 번 붙여두고 씹다가 진정 실코가 나면 그제서는 손으로 온갖 장난질을 하고 놀았다. 그 끔마저 새카맣게 된 후에야 버렸다. 당시는 화폐 단위가 1원부터 시작하였다. 1원짜리도 지폐여서 그것 한 장이면 아이들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1원짜리 지폐를 만지는 일은 드물어서 끔대신 밀이나 보리를 씹기가 다반사였다. 밀 보리를 한참 씹으면 찰기가 생겨서 제법 끔 씹는 기분이 났다. 또한 옥수수 대궁이나 수수깡도 씹었다. 씹으면 들큼한 물이 나와 그 맛으로 씹긴 했지만 그건 아무리 씹어도 밀 보리처럼 찰지지 않아 단물만 먹고는 뱉어 버렸다.

 

 

 산골 청년들은 참 재밌게 놀았다. 여름철에는 개천을 몰려다니며 천렵을 하기도 했고, 다함께 지게를 지고 올라가 나무를 해오며 장난질을 치기도 했다. 저녁에는 뉘 집 사랑에 모여 뻥을 쳐 진로소주를 사다 먹기도 했다. 어른들은 막걸리를 머셨고 청년들은 소주를 마셨다. 진로소주 역시 옥자 누나네 벽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안주로는 뉘 집 닭을 한 마리 잡기도 해서 우리 닭도 몇 마리 잡혀가기도 했다.

 평생 기억되는 소주병 딱지의 두꺼비 상표 그것. 진로소주.

 

 

 옥자 누나가 시집을 간 뒤에는 웬일인지 방앗간 기계소리가 자주 안 들리다가 어느 때 아예 멈췄다. 어떤 사정이었는지 꼬마인 내가 알 수는 없고, 따라서 벽장 점방도 그만두었던 것 같다. 우리는 곧 그 곳을 떠나 도시로 이사를 나왔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그 집 사정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아마 그 뒤에는 멀리 학교 앞 가게를 이용했을 것이나 그것도 아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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