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씨잘데기 없는 망상

설리숲 2016. 6. 28. 00:31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알 필요가 없는 것은 그냥 모르는 대로 흘러가는 게 옳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유년시절에 병을 앓았다. 아이 때 병을 앓아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더구나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의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병들은 다 겪었을 터.

 나 역시 이런저런 잔병들을 앓았을 테지만 하나도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른이 돼서 그 시절들을 상기하다가 유일하게 앓았던 기억 하나를 붙잡았다.


 아침이면 눈을 뜨지 못해 칭얼거리곤 했다. 잠은 깼지만 눈꺼풀이 붙어 눈이 떠지질 않았다. 꼬마는 무서워 울곤 했는데 그런 나를 어머니는 매일 냇물에 업고 나가 눈을 씻겨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눈을 뜨고 햇살 밝은 아침을 보곤 했다.

 처음엔 악을 쓰며 울었고 차츰 적응을 해 가면서 울지는 않고 칭얼대다가 그 후엔 칭얼대지도 않았다. 그냥 아침엔 눈을 못 뜨겠거니, 엄마가 씻겨 주면 낫겠거니 어린 소견머리가 스스로 달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역시 눈은 붙어 있어 암흑이었다. 낮인지 밤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가늠할 수도 없고 방인지 마루인지도 알 수가 없는데 어른들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깨기 전에도 내내 그 대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사이사이 귀에 선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선 목소리는 한 사람인 것 같기도 했고 두세 사람인 것 같기고 했다. 눈앞은 암흑인데다가 선잠을 깬 꼬마에게 그 상황은 그냥 꿈속인 듯 아득했다. 그런데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는 기억은 그 아득한 상황에서도 나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 눈에 관한 일일 것이라는 게 확연히 감지된 것이다. 사전에 딱히 그럴 만한 기미도 없었는데.

 그리고 나는 다시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내 눈은 말끔히 떠졌다. 오랫동안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던 그것이 없어졌는데, 광명이 왔음을 알았는데도 이상하게도 심정이 담담했다. 꼭 그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던가.


 

 아주 오랜 세월을 그 일은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문득 생각난 일화다.

 그 후에 누나 집에 갈 일이 있어 문득 생각난 그 일을 들그서내고는 그때 내 눈을 어떻게 고쳤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누나는 별거 아니라면서 알 필요도 없고 그냥 몰라도 된다고 의외의 답을 한다. 나야 뭐 굳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생각난 김에 물어본 것뿐인데, 그리고 나 역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여 쉽게 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반응이 오니 머릿속이 조금은 귀살머리스러웠다.

 응? 이건 뭐지? 혹 내가 알면 불행해지는 큰 사건이라도 있는 건가? 그제서는 상상이 머리를 넘어 무한히 휘돌아다닌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번뇌와 마음의 병이 생겨 필경은 그 사람의 인생을 잡아먹는다는 소리도 늘상 들었거니와 뜻밖의 궁금증이 나를 한동안 옭아매었다.

 별 기상천외한 상상을 다 엮었다. 사람에게 개 눈을 박으면 똥을 보면 죄다 먹는다고 아이들이랑 깔깔대기도 했었는데 그날 그 낯선 사람들이 내 눈을 빼고 개 눈을 박은 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도 했다. 똥이 먹음직스러워 보인 적이 없으니 그건 분명 아니라는 궁색한 판단으로 자위까지 하면서.


 

 그것도 다 지나갔다. 지금은 전혀 궁금하지 않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 내가 쓸데없이 지나친 상상을 하는 것에 반해 사실은 진짜 별거 아닐 수도 있다그럴 때 얼마나 허무한가. 한때의 번민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나는 중학 2년부터 안경을 썼다.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왜 어린 나이에 시력이 약해졌을까. 쓸데없이 또 이렇게 생각을 굴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또다시 유년시절로 넘어가려 한다. 그날 그 낯선 사람들은 어떻게 내 눈을 고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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