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찻집의 고독

설리숲 2016. 3. 30. 01:00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우리는 영어 말고 또다른 외국어를 공부해야 했다. 2 외국어 과목으로 우리 학교는 독일어였다. 생전 독일에 간 적도 없고 갈 일도 없고, 실제로 살면서 독일어 한 마디 할 일도 없었다. 영어는 무시로 맞닥뜨리지만 독일어는 글쎄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베토벤이니 카라얀이니 하는 독일 음악가들을 다룰 때 그 발음을 학교에서 배운 게 쓸모 있는 것 말고는 그 외에는 뭐.

 

 어쨌든 생소한 독일어를 고1때 처음으로 접하면서 나는 잊지 못하는 선생님을 만났다. 잊지 못한다고 해서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분과의 각별한 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번도 내 담임이었던 적도 없고 찾아가 인사를 드려도 내가 누구인지 모를 것인 만큼 지극히 평범한 관계다.

 

 심형식 선생님은 외모가 출중했다. 키가 크고, 몸매가 날렵하게 호리호리했다. 미목은 요즘 말로 꽃미남이었다. 피부가 뽀얗고 특히 붉은 입술, 오래도록 내 기억에 또렷한 그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항상 단정하게 자른 머리에 회색 콤비를 즐겨 입던 말쑥하고 세련된 모습. 여학교였다면 수많은 학생들을 잠 못 이루게 했을 아름다운 선생님이었다.

 

 그럼에도 선생님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고독이었다.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우수에 찬 눈이라든가 표정 딱 그것이었다. 또한 성격도 나긋하게 감성적이었다.

 막 독서에 재미를 붙이던 그 시절,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을 읽었는데 그 주인공인 골드문트를 만났을 때 나는 바로 독일어 선생님을 그 캐릭터로 매치시켰다. 감성과 고뇌를 겸비한 골드문트가 바로 심형식 선생님이었다.

 여학생이 아니었어도 선생님의 이러한 이미지는 학창시절 내내 나를 감성적이게 했다. 우수에 찬 표정과 붉은 입술의 감성적인 사람이 투박하고 거친 독일어를 말하면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해, 선생님은 아버님을 여의었다. 한동안의 휴가 뒤 돌아온 선생님의 가슴엔 상장이 달려 있었다. 그 뒤로 선생님은 더욱더 고독하고 슬퍼 보였다. 상중이니 일부러 말수도 줄였을 테고 표정도 더욱 쓸쓸해 보였다. 나도 안쓰러워 덩달아 우울해졌다.

 

 가을 소풍 때 처음으로 선생님의 다른 맨드리를 보았다. 늘 정갈한 양복차림의 모습만 보았는데 소풍 때 하얀 티셔츠에 스노우진을 입었다. , 그 모습 또한 얼마나 근사하고 매력 있던지! 그 하얀 티셔츠 가슴에도 누런 상장이 달려 있었다.

 장기자랑 시간에 선생님들도 노래 부를 기회가 있었는데 독일어 선생님도 강제로 호출이 되었다.

 

 그날 선생님이 부른 노래가 <찻집의 고독>이었다. 눈웃음이 넘치지만 고독한 눈매에 붉은 입술로 부르는 그 노래는 내 마음을 애잔하게 했다. 보통은 그런 자리에서는 아이들 분위기 깨지 않으려는 노래를 하기 마련인데 선생님의 선곡이 또한 고독했다.

 마지막 부분에 뚜루루루 루루루루루 하는 허밍에서 나는 그만 가슴이 젖고 말았다. 선생님의 티셔츠에 달린 상장이 더욱더 애슬프게 다가왔다.

 

 그땐 이러한 감정들을 모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문득 생각나는 학창시절의 선생님은 담임도 아니고 유난히 나를 아껴주었던 선생님도 아닌, 나와는 터럭만큼의 연관도 없는 바로 그 선생님의 고독한 얼굴이니 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그 가을소풍이 내 학창시절의 마지막 소풍이었다. 이듬해에는 본격적인 대학입시준비체제로 전환하여 소풍 따위 공부에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은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나훈아는 우리 트로트의 상징 같은 존재지만 이 <찻집의 고독>은 장르가 다르다. 문학으로 친다면 모더니즘에 해당하는 낭만적인 노래다.

 작곡가 박정웅이 아가씨를 소개받아 어느 찻집에서 기다렸지만 여인은 끝내 오지 않았고 이 노래는 그 심정을 담은 노래라고 한다. 실은 약속 날짜를 잘못 알아 아가씨는 그 다음날 찻집에서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후일담이다. 우리 인간세의 인연은 이렇듯 어긋나서 비껴가기도 하고, 도저히 만나질 것 같지 않은 절벽 같은 상황에서도 만날 사람은 만나지는,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노랫말에 가을에 관한 단어는 없지만 이 노래는 분명 가을 노래다. 초추양광이 갈색 탁자에 비껴 떨어지는 고독한 가을날 오후.

 독일어 선생님이 뚜루루루 노래 부르던 내 생애 마지막 그 가을소풍이 아련하다.

 

 

 

 

 

 

 


 

 

박정웅 작사 작곡 나훈아 노래 : 찻집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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