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던가. 유니 정다빈 등 젊은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 사망으로 꽤나 우울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 모 TV채널에서 이 현상을 다루면서 소개했던 음악이 있다.
1930년대 헝가리의 셰레시 레죄(Seress Rezső)라는 음악가가 작곡한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다. 실연한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했던 셈인데 이 곡에 대한 일화는 너무도 많아서 노래를 듣고 자살하는 사람이 몇 명이라 등 하는 낭설들이 지금까지도 떠돌고 있다. 심지어는 연주를 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죄다 죽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소문은 소문을 낳고 여전히 그것은 진행 중이다. 단순히 실연의 심정을 담은 것이었을 노래가 나비효과가 된 사례일 것이다.
셰레시 레죄가 이 노래를 발표하고 그 여인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날 그 여인이 자살을 했다고 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죄의식으로 오랜 세월 고통 받던 작곡자 자신도 결국 아파트에서 투신을 했는데 최후로 자신의 음악을 들었다 한다. 워낙 날조된 이야기들이 많아 이것도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런 연유로 해서 헝가리 정부에서는 이 곡을 금지시키고 악보 등 관련된 메뉴를 다 압류했다 하니 황당무계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노래가 자살충동을 일으킨다는 건 아니겠고 다만 세계대전중인 당시의 혼란상이라든가 소련의 식민지배나 세계적인 대공황 등 암울한 상황이 사람들을 못 견디게 했을 테고 이 노래가 그들의 가슴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보다도 채만식의 소설을 이야기하려 한다.
어쩐 일인지 문득 책이 읽고 싶어져 얼마 전 주인집 서가에 가서 뽑아든 게 고은과 채만식이었다. 채만식이 군산 출신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고은도 군산 태생이란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생각 없이 뽑아든 두 작가가 군산이라 신기하다는 생각을 잠깐 하였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너무도 유명한, 우리 문학사의 보물 같은 작품이다. 학생 때도 수시로 듣고 외기도 했던 그 소설을 이제야 읽은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계봉이라는 등장인물이 ‘그루미 선데이’를 흥얼거린다는 의외의 대목이 나와 눈이 커졌다. 탁류가 1937년 출간된 소설이니 그렇담 글루미 선데이 노래는 그 이전에 나온 노래였던가. 찾아보니 과연 1933년에 작곡한 노래라고 한다. 난 그마저도 몰랐었다.
내가 경이롭게 생각한 것은 ‘우물안개구리’였을 일제식민시대의 사람이 어떻게 먼 유럽의, 그것도 헝가리라는 작은 소련 속국의 노래를 알고 그것을 소설에 썼을까 하는 놀라움이었다. 노래는 1933년에 작곡했지만 실제로 연주돼서 세상에 알려진 건 1936년이었으니 채만식이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식자인 것이다.
1999년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글루미 선데이>가 제작되었다. 영화의 내용은 모두 다 알고 있거니와 이것 또한 경이롭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암울한 시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류의 흐름에 휩쓸려 인간성을 말살당하는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 역시 그런 얼개의 이야기고 한 여인과 세 사나이 등 등장인물들의 구조가 같다. 이 얼마나 기막힌 유사함인가. 영화가 실화였다 하지만 채만식도 그 실화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영화가 혹 소설 <탁류>를 모티프로 해서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추측도 해 본다.
책을 읽으면 세상이 보인다고 하는데 새록새록 그 말을 이해하겠다. 그렇더라도 나는 책을 읽지 않으련다. 그딴거 몰라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은 없다. 알면 알수록 머리는 더 복잡하고 번뇌만 쌓인다. 단순하자. 당장 배에 넣을 음식과 필요한 돈을 버는 게 내게는 더 진리이다.
이 글을 쓰려고 검색을 하다 보니 고 정다빈의 사망 날짜가 2월 10일이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탁류>를 읽은 시점이 우연히 같아졌다. 늦었지만 그녀의 명복을 빈다.
빗소리와 함께 듣는 이 노래가 과연 처연하게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어떤 이에게는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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