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인기 스타아-가 되려면

설리숲 2016. 2. 22. 00:15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커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우리 집에 고서 한 권이 있었다. 책제가 <인기 스타아-가 되려면>이었다. 우리가 두어 번 이사를 했는데 그 책은 누가 챙겼는지 항상 누나의 책꽂이나 서랍에 있었다. 그렇다고 누나가 그걸 보는 것도 아니었다. 늘 눈에 띄던 거였지만 내가 그 책을 읽은 것이 중학교 때쯤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있었다는 걸 지금 기억해 낸 것이고 지금은 없다. 언제 없어졌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집에서 분가해 나간 형제들 중의 어느 집에 있을지도 모르지. 책 표지가 워낙 두껍고 튼튼해서 전혀 훼손되지 않았던 그 책.

 거기에는 김진규 김지미 최은희 최무룡 문희 남정임 등 은막 스타들의 사진도 나오고 인터뷰도 나오고 영화촬영 현장의 스틸도 실려 있었다. 60년대 산골의 촌가에 그런 책이 있었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좀 의아스러웠다.

 

 그 의아함은 나중에 성인이 되면서 풀렸다. 내 맏형이 지독한 연예인병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으니 스물이나 그 안짝이었겠다. 가난한 산골 농사꾼 아들이 무슨 돈이 있어 영화나 한 편 제대로 볼 형편이었겠냐만  어쨌든 형은 영화배우 광팬이나 영화 마니아 수준을 넘어 실제로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집을 떠나 상경하여 어찌어찌 영화촬영팀에 빌붙어 지냈다는 것이다. 배움도 모자라는 무지렁이 시골 소년이 그런 연줄을 잡아 쫓아다닌 재주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었다. 하긴 꿈이 있고 뜻이 있으면 다 통하는 법이니 당시 형은 영화로 출세하는 것이 자신의 최상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은 꿈으로 끝났다. 여기저기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날을 보내도 도저히 형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라도 못 배운 시골 촌놈한테 무얼 줄 생각이 있었을까. 풀이 죽어 서울과 영화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하기 싫은 농사일을 해야 했다. 형이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했는지 아니면 스태프나 그 밖의 무슨 일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나, 설령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심부름하는 허드렛일만 했다 하더라도 그 나날들이 형은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질풍노도의 혈기방장한 소년들은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으랴. 해종일 허리를 구부려 박고 땅이나 파는 농사일을 누군들 하고 싶어했으랴. 죽기보다도 하기 싫은 그 일을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그 절망감을.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 그저 아버지가 하는 일을 거들다가 필경은 그 일을 떠맡게 되고 그래서 평생 농사꾼으로 가난하게 살다 마치게 되는 미천한 팔자 아니던가.

 

 그런 숨이 막힐듯 울적한 심사를 바로 그 책 <인기 스타아-가 되려면>으로 달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났을 때는 형은 한바탕 세파의 소용돌이를 겪고 돌아와 참하게(?) 집안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어 장가도 들었다.

 

 나중에 그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형에 대해 일말로 다르게 보았다. 형에게 그런 멋쟁이 한량 끼가 있었구나. 꿈도 야망도 없이 죽어라고 땅만 파는 여느 소년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인드를 가진 형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 꿈을 펴지 못하고 시르죽어 귀향할 때의 그 심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하고는 더없이 처량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나 여덟 살 되던 해 도시로 이사를 나와 가까운 영일빵 공장에 들어가면서 숙명일 것 같았던 농군의 굴레를 벗긴 했지만.

 

 맏형은 고인이 된지 오래다. 돌아보면 운명을 극복하지 못한 가여운 일생이었다. 그 책. 지금에사 생각하면 의미 있고 귀한 책인데 진작 내 셈이 슬기로웠더라면 잘 보관해 두었을 걸 많이 아쉽다. 혹 어느 집에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희박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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