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들어서니 음악이 흐른다. 남도 음악인 것 같은데 처음 듣는 노래다. 남원이다. 동편제의 고을, 혼불의 고장, 섬진강이 흐르고 장엄한 지리산이 굽어보는 곳. 끊임없이 음악과 문학이 생성되는 곳.
간밤에 눈이 내렸지만 날이 많이 포근해졌다. 이제는 짜장 한파는 없으리라. 꽃샘추위야 뭐 무시해도 된다. 둘레길을 걷는다. 오늘은 교룡산(蛟龍山). 산이란 산에는 죄다 길을 만들어 놓고 또 죄다 둘레길이라 이름 붙였다. 웰빙이라 하여 자동차 대신 도보가 활성화 되면서 언제부턴가 도보 열풍이 일고 지자체마다 너도나도 길을 만들어 댄다. 활용성과 타당성도 무시하고 그저 유행처럼 그렇게 하는 게 과연 옳은지 모르겠다. 산을 깎는 것이 자동차 폐해보다 더 나은지 아닌지는 얼핏 판단이 서지 않는다.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고 하는 교룡산성이다. 성곽에 올라서면 남원 시내와 그 뒤 지리산 첩첩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선국사로 오른다. 예전엔 식솔이 3백여 명이나 되는 큰 가람이었다고 하는데 영락하여 지금은 조촐하고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아마 그대가 가장 번성했으리라 짐작한다. 동학 때는 최제우가 은적암에 은거하며 <도수사><논학문><권학가><검가><몽중노소문답가><수덕문>을 집필하여 동학사상을 이론화하고 집대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은 터만 남은 은적암으로 오른다.
실은 이곳은 두 번째다. 13년 전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어느 공동체에 머물고 있었다. 그 안에서 혼사가 있었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부정적인 혼사였으므로 나는 비판과 질타의 의미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날 여명 전에 빠져나왔다. 정찬주 저(著) <암자로 가는 길> 포켓용 책을 들고 제일 먼저 찾아간 게 이 선국사였다. 당시에는 이곳에 교룡산성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고 난 그저 꼴 보기 싫은 사람들과 그리고 꼴 보기 싫은 혼인을 보지 않으려는 생각뿐이었다.
한파가 맹렬하게 볼을 얼리는 소한 무렵이었다. 선국사를 비롯하여 정찬주 작가의 책이 소개한 전북 지역의 작은 암자를 골골이 찾아다녔었다.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에 등장하는 귀신사를 찾아간 것도 이때였다. 카메라가 없어 사진은 못 찍고 소회와 감정들을 노트에다 기행문처럼 기록을 했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찾지를 못하겠다. 읽어 보면 온통 어둡고 고리타분한 감정들로 가득 차 있으리라. 그 날들의 내 심신이 그랬으니까.
나중에 이사를 할 때는 정리가 되어 노트도 발견되겠지만 그날 은적암으로 오르면서 느꼈던 감정은 어제인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얗게 눈 쌓인 오솔길에 도열해 있던 새파란 대나무. 흰색과 초록색이 대비되어 더욱더 새뜻하게 빛을 발하던 풍광. 아마 몹시 무겁고 어두운 심신으로 대하는 것이라 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났던 콩새 한 마리. 유년시절 겨울에는 덫을 놓곤 했는데 가끔 걸려 잡히던 콩새였다. 이후로 어느 숲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 새를 30년이 지난 후에 만나게 된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주둥이가 노란 겨울새 콩새.
그리고 싱싱하게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던 인동초를 보았었다.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려 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던 기억까지.
보제루에서 보는 남원 시내
은적암 터
선국사 대웅전 앞 기단에는 기묘한 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그때에는 무슨 나무인지 몰라 궁금했었는데 배롱나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왜 기묘했다고 했냐면 바로 앞에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이 나무가 가지들을 뻗어 이 석탑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아버지가 딸을 두 팔로 감싸 안은 형상으로 배롱나무가 석탑을 무서움의 대상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무가 탑을 감싸 안고 있었다. 아 저 기괴하고 신묘한 광경이라니.
석탑을 감싸 안은 기묘한 배롱나무
교룡산성을 바라고 나선 이 나들이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엣 기억들이 또렷이 돌아 나오는 뜻하지 않은 상쾌한 경험을 맛보았다.
다람쥐와 함께 성곽에 올라서서 바라본 남원시 전경과 지리산
선국사 코 앞이다. 이런 집 사찰에서 규제를 못하나? 닭 찌는 냄새가 어디 갈데없이 바로 절집으로 넘어갈 텐데...
이건 좀아닌듯...
남원산성은 곧 교룡산남원성이다. 이 노래를 <남한산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바로잡아야겠다.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떴다 봐라 저 종달새
석양은 늘어져 갈매기 울고 능수 버들가지 휘늘어진다
꾀꼬리는 짝을 지어
이 산으로 가면 꾀꼬리 수리루
음~음 어허야 에허야 디여어~
둥가 허허둥가 둥가 내 사랑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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