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로 만든 이름이거니와 나주는 목(牧)일 정도로 옛날부터 번화하고 은성한 큰 고을이었다.
일제의 지배를 받은 슬픈 역사가 있어 이 땅 곳곳에 그들의 잔재가 남아 있는데, 특히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넓은 강 유역은 그들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더군다나 영산포는 드넓은 호남평야의 곡식들을 수탈해가기 가장 좋은 포구여서 원하든 원치 않든 일찍부터 큰 시장으로 각광받고 호황을 누리던 곳이다.
금강의 강경도 그렇고 하류의 군산, 장항이라든가 영산강 하구의 목포, 포항 구룡포 등에는 일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들과 공공건물들이 남아 있어 그 시절의 일본식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슬픈 역사지만 어쨌든 우리 문화재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 지방의 풍경과 느낌은 좀 색다르다. 세련되게(?) 표현하면 엑조틱하달까. 60~70년대의 과거에 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언덕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라든지, 전혀 현대화되지 않은 옛날식 가겟방들.
여행자들은 이런 이방적인 풍경을 즐기지만 여기서 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답답해서 한 달 만에 떠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일본인 지주 저택
일제 강점기 나주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쿠로즈미 이타로가 살던 집이다. 1905년 영산포에 온 쿠로즈미는 불과 4년 만에 영산포에서 가장 큰 지주가 되었고 1930년에는 나주에서 가장 큰 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가마니주식회사 사장, 다시수리조합장, 전남중앙영농자조합장 등을 역임했다. 이 주택은 1935년에 지었으며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선교사가 고아원으로 운영했고, 그후 개인이 주택으로 사용하다 현재는 나주시가 매입해 관리하고 있다.
홍어의 거리
1960년대 각종 수산물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던 영산포구는 지금은 ‘홍어의 거리’가 되어 전문 음식점과 도매점이 밀집해 있다. 과연 근처에 가자 특유의 홍어 냄새가 진동한다.
비 내리는 날 경주 감포읍 시내 대기는 생선 비린내로 가득찼다. 과연 이런데서 살다 보면 깨끗하게 빨래를 해도 비린내가 옷에 배겠구나, 그러니 어딜 가도 갯가 촌놈이라는 게 단번에 표가 난다. 법성포에서는 조기냄새 그리고 영산포는 홍어냄새.
원래부터 ‘썩은 고기’를 먹었던 건 아니고 운송 도중 홍어가 상하곤 했는데 그 향과 우연히 먹어본 맛에 매료되기 시작해 그때부터 일부러 삭히게 되었다고 한다.
동양척식회사문서고
일제는 나주의 드넓은 농지에서 수확되는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1909년 영산포에 동양척식회사 나주지점을 설립하였다. 1916년에는 목포지점 영산포출장소로 이관되어 쌀 6만 5천 석, 보리 2천 석, 목화 1만 근을 관리하였다. 현재는 붉은 벽돌로 지은 문서고만 일부 변형되어 남아 토지수탈의 본거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옛 영화관 건물
해남에서 지내다가 강원도로 돌아갈 때 길목이어서 반드시 지나가곤 했던 영산포다. 한번 이곳에 들러 한나절 둘러보고 싶은 마음은 있으면서도 내내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설날이다.
이런 날은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아 나그네들은 더 쫄쫄 굶기 마련이다. 만만한 게 편의점이다. 이름 그대로 편의하다.
완전하진 않지만 겨울이 물러가고 따스한 햇볕 가득한 남도의 한 곳 영산포다.
영산포의 상징인 나룻배와 홍어. 화장실도 나룻배 형상이다.
한국에는 ○○ 처녀, ○○ 아가씨란 노래가 어찌 이리 많은 거냐. 거개가 다 여자들의 순정과 한에 대한 내용인데 외국인들이 보면 한국 남자들은 죄다 나쁜 놈, 몰인정한 놈인줄 알겠네.
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 이미자 노래 : 영산포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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