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초록의 茶園에서

가장 행복했던 하루

설리숲 2007. 6. 29. 22:47

 

 오전에 법제를 끝내고 나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해졌다.

 안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날은 지리산 저쪽 너머 화개에서 차문화축제가 열린다.

 점심을 먹고 영장을 챙긴다. 여장이라야 모자 눌러쓰고 슬리퍼 대신 운동화로 갈아 신는 게 고작이다. 차축제 보다는 지리산 깊은 골 상명 선생님을 찾아가는 게 주목적이긴 하다.

 일행들과 트럭을 타고 내대리를 거쳐 청학동을 지나 삼성궁 매표소에 내렸다. 거기서부터 험한 산행을 할 것이었다. 산행에 자신 없는 일행들은 다시 트럭을 타고 돌아갔다. 지리산을 빙 돌아 화개로 가서 거기서 우리와 다시 합칠 예정이다.

 삼성궁.

 온통 돌로 쌓은 건축물들.

 사진으로만 보았던 삼성궁의 이모저모를 내가 직접 찍어본다. 종교적인 내력이야 그닥 관심없고 그저 생경한 풍경들에 눈을 호강시킨다. 오래 둘러보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화개에 도착해야 한다. 험한 산중의 야간산행은 위험하다. 더구나 비온 다음 날의 산길이라.


 등산로.

 어둑신하게 숲이 우거졌다. 사뭇 물소리가 들린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찬 계곡물이다.

 

 

 유 도사가 길라잡이를 섰다. 도인들이라 다들 발걸음이 날래다. 나 역시 산길을 걷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그리 어렵지 않게 속도를 맞춘다. 그러나 워낙 가파르고 험한 길이라 서로 말은 안 해도 땀들이 주루룩 흐른다.

 화개로 넘어가는 길은 온통 단풍나무 숲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여름의 신록도 좋지만 가을에 와도 근사할 것 같다는...

 

 간힘을 들여 지친 끝에 상명 선생님 댁을 찾아냈다. 깊은 밀림 속에 움막을 짓고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분이다. 말이 움막이지 스무골 내 집보다 훨씬 번듯하고 튼실하다. 선생님의 마당에서 다같이 가부좌를 틀고 잠시 산의 기를 받아들인다.

 상명 선생님을 안동하여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 축지를 하듯 훨훨 난다.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느덧 불일폭포. 해는 이미 산 뒤로 떨어졌다.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 싸아하게 몸이 식는다.

 

 

                               불일암에 들러 부처를 본다.

                              암자에서 보는 지리산의 장엄한 석양.

 

다시 훨훨 내달아 내려간다. 드디어 산방(山房)이다. 예까지 오면 목적지에 다 온 것이다. 동명산방은 예전 삼신봉을 오를 때 쌍계사를 지나 들른 적이 있다.

 아직 노란 석양이 남아 있다.  

 

 쌍계사에 이르자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절 입구에서 다시 일행과 합류했다.

 사찰국수와 함께 막걸리로 저녁 식사. 화개계곡은 그야말로 흥청망청 축제분위가가 고조되어 있었다.

 섬진강 판소리학교 교장인 김서현 씨가 우리 방에 들러 걸쭉한 소리를 하나 풀어놓는다. 곡목이 ‘몽한가’라 한다. 막걸리에 취해 제대로 감상은 못했지만 기분은 최고다. 우리가 언제 전문 소리꾼의 소리를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서 들어볼 수 있겠는가. 전라도 땅은 예(藝)의 땅이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화개는 점점 밝아진다. 주무대에서는 현란한 음악과 함께 춤판이 어우러진다. 곧이어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주무대에서 쏘아올리는 조명이 합세한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불꽃축제였다.

 

 벚나무길은 사람과 차가 인산인해다. 그곳을 뚫고 어느 민가로 들어간다. 여기서 또한번 잊지 못할 경험을 한다.

 가수 고명숙.

 늦은 나이에 가수로 입문한 여자다. 우리가 들어가자 선잠을 자다가 급히 뛰어나온다. 눈초리가 매섭다. 무기(巫氣)도 보인다. 예인들의 눈에선 신기가 뿜어져 나온다. 아까 소리꾼 깃서현 씨의 눈에도 신기가 가득했었다.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내 눈은 그저 선량하기만 하니 아무래도 나는 예인은 아닌 것 같다.

 잠시 한담. 곧이어 그녀가 기타를 안는다. 내게 사진찍기를 허락하고는 노래를 시작한다.

 자칭타칭 여자 장사익이라 불린단다. 그날밤 이슥하도록 그녀의 노래를 코앞에서 듣는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엄연히 음반까지 출반한 대중가수다. 그가 오로지 우리 아홉 명을 위하여 노래를 불렀다. 아 감동이다.

 그녀는 고운동을 직접 방문해서 노래를 하기도 했다. 내가 들어가던 그 첫날 저녁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함께 하지 못해 정말 아쉬운 마음.

 그녀는 이튿날 산청에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김태곤과 함께 하는 공연이 있었지만 나는 일 때문에 가지 못했다.


 고운동으로 돌아온 건 자정이 임박해서였다. 단 하루였지만 그 하루가 몇 년처럼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즐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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