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노을>은 <고향의 봄>을 제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선정되었다.
이 노래에는 불미스러운 비화가 얽혀 있다.
아름다운 동요를 만들어 한국인의 정서함양에 이바지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MBC는 1983년 창작동요제를 개최하였다. 2010년 폐지될 때까지 주옥같은 노래들이 탄생하였다.
<노을>은 1984년 제2회 대회의 대상곡이다.
당시 이 대회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을>의 작곡자 최현규는 교사가 아니었다. 군에서 제대할 무렵 동요제의 공지를 접하게 된 최현규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로 참가하고 싶었지만 자격이 안 되었다. 그래서 당시 성동초교 교사이던 안호철에게 곡을 빌려 주었다.
이동진 작사 안호철 작곡으로 참가한 <노을>은 대상을 차지했다.
노래는 이후 신드롬을 일으키며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요로 부각하게 된다. 두 사람은 원래 약속하기를 이름만 빌려 대회에 참가하고 노래를 다시 원작자에게 돌려주기로 했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부정행위다. 속이고 조작하여 많은 사람들을 능멸하는 짓이다. 노래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부도덕하고 추한 짓이라 비난하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런 유의 부정은 인간사회에서 상존하는 행위여서 문학이나 영화 등 여러 예술분야에서 심심치 않게 드러나곤 한다. 영화 <은교>에서도 다른 사람의 글을 자기 이름으로 내어 명성과 함께 인세던가 원고료던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참회.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어느 날 가까운 지인이 나더러 소설 하나만 써 달라고 부탁했었다. 모 업체에서 단편소설을 공모하는데 상금이 엄청 많다더라고. 여성만 자격이 있다고 하는데 상금은 욕심나고 글재주는 없고, 그래서 내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출품하겠다고 한다. 나는 당연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워낙 끈질기게 진피붙는 데에 할 수 없이 부개비잡혀 그러마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 새로 쓰지는 않고 그 전에 습작으로 끼적거려 처박아둔 것 하나를 내어 대충 손질하여 건네주었는데 얼마나 기분이 께름칙하던지. 명색이 작가라면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본연의 정체인 것을. 아무리 하찮은 글이라도 부정의 하수구에 담그는 건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럴 리는 물론 없겠지만 당선이 안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당선이 안 됐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만일 그 소설이 당선이 됐더라면 나는 평생을 옥죄이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사악한 부정행위를 한 건 틀림이 없다. 참회한다.
다시 노을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런데 노래를 돌려주기로 했던 안호철은 그 약속을 깨고 오랫동안 <노을>의 작곡자로 있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여전히 인터넷을 검색하면 안호철 작곡으로 되어 있다.
이 비밀이 알음알음 번져 나가면서 사람들은 원래의 작곡자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인식들을 모았다. 작곡가 신귀복이 이 사실을 알고는 두 사람을 물러 삼자대면을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안호철은 이실직고하고는 그해 가을까지는 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 약속도 해를 넘기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신귀복은 <한국저작권협회> 부회장이었는데 자신의 직권으로 최현규를 <노을>의 작곡가로 저작권협회에 정식 등록했다.
이렇게 해서 오랜 세월 뒤에 노을은 제 주인의 이름을 찾은 셈인데 여전히 최현규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미약하다.
최현규는 이 곡 하나만으로 홍난파에 버금가는, 한국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부정으로 탄생한 이 노래.
만일 그 부정이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노래는 영원히 흙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딜레마가 생긴다. 부정이 아름다운 결과를 맺었으니 면죄부를 주어야 할까. 머리는 냉철한데 가슴은 유하니 이럴 때 우리는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노래 <노을>이 정말 좋다. 가슴이 머리를 이기는 것도 괜찮다고 짐짓 자위해 본다.
<노을>은 작사자 이동진이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평택의 한 들판에서 본 감상을 쓴 것이라 한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으로 지는 저녁노을. 상상만으로도 그 감동을 알겠다. 가을에 한번 가 보려 한다.
이동진 작사 최현규 작곡 권진숙 노래 :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