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날부터 아침까지 내내 기상캐스터가 비가 내릴 거라고 알려 주었다. 어둠이 걷히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날은 어둡다. 과연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비가 내리면 모든 게 불편하다. 우산을 써도 그렇고 우의를 입어도 그렇다. 차를 가지고 가면 걱정 끝이겠지만 그럴 거면 떠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어차피 차를 안 가져왔으니 별 의미도 없는 궁리긴 하지만.
은비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설 연휴가 끝나 가고 있었다. 아직은 한겨울인데 비가 내린다니. 하긴 겨울치고는 제법 푸근한 날들이 며칠 이어졌다. 편의점에 들러 우의를 사면서도 그래도 이곳 인제는 산간지역이니 비대신 눈이 내릴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기대도 해 보았다. 눈이라면 정녕 불편함이 없을 텐데.
편의점 아가씨가 굉장한 미인이었다. 이런 궁촌에 저런 뛰어난 인물이 있군. 인제 원통, 곳곳에 군부대가 산재해 있는 군사지역이다. 아마 인근의 군인들이 이 편의점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겠구나 싱거운 생각을 한다. 우의와 함께 햄버거와 샌드위치, 우유와 커피 등 혹 은비령을 헤매다 기상악화에 불의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을까 하여 충분히 먹을 것을 사 넣었다.
은비령을 가려면 직행버스를 타고 한계령에 내리면 게서 가까우니 수월하게 다녀올 테지만 나는 일부러 먼 길을 택한 터였다. 군내버스를 타고 귀둔리 삼거리에서 내려 골짜기를 걸어 들어갈 요량이었다. 어차피 하루를 보낼 셈으로 나선 길이니 빨리 다녀올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거였는데.
편의점을 나와 9시에 있다는 현리행 군내버스를 타려고 터미널로 걸어가자니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이런.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는 택시로 다가가 운전기사의 명암을 하나 받아 넣었다. 만일의 경우 택시를 불러 타고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니.
귀둔리 삼거리에 닿기 전에 버스 앞 유리에는 와이퍼를 작동하게 비가 뿌려대고 있었다. 창밖 풍경은 하얀 눈의 세상이다. 설경과 함께 보는 비는 색다른 분위기다. 버스에서 내려 우의를 걸치고 단단히 옷을 여민다. 앞으로 너댓 시간은 비와 추위에 노출돼 있어야 했다.
은비령을 향해 계곡을 들어간다. 내린 비가 얼면서 바닥이 미끄럽다. 시작부터 걸음이 만만하지 않다. 게다가 바람도 불어댄다. 우의가 펄럭이며 시나브로 옷이 젖어든다. 손도 시리고 안경은 빗물에 얼룩져 잘 보기도 어렵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메었건만 손발 움직이는 것부터가 자유롭지 못하니 카메라를 들고 초점 맞추기도 어렵다. 게다가 렌즈도 빗방울을 맞으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어쨌든 만행하는 수도자라고 자기최면을 걸고 은비령을 향해 걸어갔다.
은비령은 지도에 없는 고개다. 소설 속에 설정된 가공의 무대다. 작가 이순원이 은비령으로 설정한 곳은 필례령이다. 소설의 성공으로 사람들은 이제 그 고개를 은비령이라 한다. 은비령(隱秘嶺). 이름처럼 은밀하게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는 고개다.
왠지 겨울이어야 어울릴 것 같은 곳. 은비령.
골짜기는 온통 눈, 겨울나라다. 그 위로 떨어지는 비. 소설에서는 봄인데 폭설이 내렸고 현실에서는 겨울인데 비가 내린다.
세차게 부는 바람. 우의가 별무소용이다.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다. 말 그대로 은비령이다. 차라리 좀 더 추워서 눈이 되어 내렸으면 좋을 걸 망할놈의 날씨는 적당하게 추워서 내리는 족족 길바닥은 얼고 얼굴에 부딪치는 빗물도 차다.
어디 비그을 데도 없어 준비해간 간식을 꺼내 먹기도 어렵다. 젠장. 아까 받아둔 택시기사의 명함은 주머니에 있는데 이미 맞을 거 다 맞고 고생도 웬만큼 다 했는데 그제서 전화해 오라 하기는 아까웠다.
그렇게 해서 오른 은비령이었다. 고갯마루가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짙어졌다. 그리고 바람은 더 세차게 불어댔다. 나는 과연 고행중인 수도자였다. 그렇게 집심하니 위안이 되고 한기도 덜했다. 세파에 적응된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조건이 악화될 것도 없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이왕 버린 몸.
그 고개를 올라 봤자 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디나 있는 고개 중의 하나다. 애시 뭐 특별히 기대한 것도 없었고 그저 그러려니 예상했던 터였다. 그런데 오르고 보니 안개에 파묻힌 세상이 더없이 안온하고 신비하게 느껴졌다. 이런.
날이 맑았거나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고갯마루였을 것을 화가 바뀌어 복이 된(轉禍爲福) 셈이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바람 역시 세찼지만 기분은 나지막이 가라앉았다. 설명할 수 없는 평화였다. 카메라를 꺼내 안개로 시계(視界)도 명확치 않은 허공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필시 카메라에는 아무 것도 찍히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온통 안개였다. 안개 안개.
이 우주에 오직 나만이 혼자 대지를 딛고 서서 싱싱한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또는 태초에 천지가 개벽을 하면서 처음 탄생한 생명체인 것도 같았다.
이순원 작가도 이렇게 비 뿌리는 겨울날에 왔었을까. 와서 안개로 가득한 이곳에 서서 그 신비를 체험했을까. 그래서 그 소설이 마구마구 쓰여졌을까.
안개 속에서 솔베이그를 흥얼거리며 처연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솔베이그의 노래를 듣는다. 은비령과 '솔베이그의 노래'는 관계가 없다. 소설 <은비령>에는 아일랜드 가수인 엔야<Enya>가 곳곳에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엔야의 노래를 듣는다. 엔야의 노래들은 신비로운 정서를 담은 노래들이다. 작가는 이 은비령의 신비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엔야와 그 노래들을 쓴 것 같다.
오래 전(1999년)에 KBS단막극으로 <은비령>이 방영되었었다. 그때 이순원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보통의 연출자라면 이 소설을 드라마화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엔야의 노래들을 백그라운드로 깔거나 주 테마음악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연출자는 감각이 남달랐는지 그리그의 <솔베이그의 노래>를 테마음악으로 흘렸다. 그때 들은 루치아 포프의 이 노래가 어찌나 감성을 건드렸는지 드라마의 내용은 흘러버리고 겨울 골짜기의 영상과 함께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안개 속에 서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처연히 비를 맞고 있었다.
바우길에서 이순원 작가
그리그 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그의 노래: 바바라 헨드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