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필요치도 않은 걸 들었다. 글에서 읽었는지, 아니면 노처녀로 늙다가 뒤늦게 시집을 가서 날마다 기분이 좋아 헤벌쭉이던 직속상사 전 계장님이 요즘 시(詩)가 눈에 들어온다고 날마다 몇 구절씩 읊어주던 입에서 나온 걸 들었는지, 아니면 EBS다큐멘터리에서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상사화.
이름도 생소한 그것이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어 만나지 못하는 애틋한 사랑을 상징한다나 뭐라나. 상징이고 나발이고 그것보다도 상사화라는 이름이 어쩐지 평범하게 들리지 않아 참 궁금하였다.
글쎄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있었으면 궁금하지도 않을 걸 그때만 해도 꽤나 옛날이어서 어쩌다 핸드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전화도 오지 않으면서 자랑하느라 무전기 같이 큰 그것을 꺼내들고 들여다보며 과시하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해 겨울, 계절장사인 회사는 비수기라 휴가를 얻어 사전에 미리 듣보아 둔 상사화라는 꽃이 있다는 어디 절 무슨 절을 돌아보려 전라도로 내려갔다. 한데 가면 뭐하나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아야지. 그래도 절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뭐 처음 보는 이상한 꽃이 있으려니 그게 상사화려니 싶었다.
귀신사 영국사 금산사를 돌고 완주 송광사 순창 강천사까지 돌아 나왔으나 상사화는커녕 풀 한포기 볼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한겨울에 무슨 풀이 있겠냐고 이 또라이야!
헐, 그렇군. 기껏 돌아다니다가 그제서야 깨단했다. 겨울이다 겨울. 지금 생각해보도 기가 막힌 흑역사였다.
그래 다음 예정지였던 선운사행을 포기하고 돌아와 버렸다.
잎과 함께 꽃대가 나고 잎이 지고 나서 꽃이 핀다고 해서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 한다. 얼핏 신기한 것 같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게 어디 한 두 갠가. 목하 한창인 요즘 봄꽃들이 다 그렇다. 꽃이 일단 먼저 피고 꽃잎이 다 지면서 잎이 나오지 않더냐. 개나리 목련 벚나무 진달래 등.
어쨌든 상사화라는 이름은 공연히 마음에 걸린다. 만나지 못하는 인연은 얼마나 고통인가.
지난 가을, 오래 전에 딱 한번 얼굴 보고는 이후로는 가금 SNS나 문자를 통해 안부 정도나 확인하는 사람을 하나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꼭 보고 싶을 정도로 그리운 사람도 아니고, 앞으로 한번도 안 봐도 상관없는 지극히 평범한 관계일 뿐인데 가을이어서 그랬을까 문득 그를 한번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선운사였다. 물론 이제는 상사화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은 어느 절에도 다 있는 것이고 절뿐이 아니라 내가 사는 스무골에도 돌무더기 따위 옆에서 피는 것을 보곤 한다. 더구나 선운사는 이미 여러 번 다녀온 터라 그리 신비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선운사가 생각난 것은 아마 상사화를 찾아다니다가 끝내 가지 않고 돌아온 그해 겨울의 선운사가 오롯이 그리움의 여운으로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정인도 아니면서 그 사람을 거기서 보려고 작정한 것은 아마도 가을이 주는 센티멘털이 그를 정인처럼 여기게 했던 것 같다. 가을은 문학적인 감성이 고조되는 계절이니까.
문자로 오랜만에 그를 노크하고 선운사엘 가지 않겠느냐 하니 대번에 좋다고 한다. 한 달 정도의 여유를 두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정작 만나기로 할 시기가 다가오자 저쪽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한동안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 답은 그렇게 하지만 이쪽에서는 충분히 낌새를 안다. 뭐 그렇지. 애인도 아니고 꼭 만나야 할 관계도 아니니 그렇게 흐지부지 넘기고 가을을 지냈다. 굳이 ‘상사화 같은 여운을 남기고 겨울을 맞이했다’는 문학적인 표현을 쓰고 싶었다.
아쉬운 건 선운사의 단풍이 한창일 텐데 그 핏빛 색채가 눈앞에 아른거려 혼자라도 당장 가고 싶었는데 하루 이틀 미루다가 내게도 일이 생겨 그만 기회를 놓치고 가을이 끝나 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상사화 같은 애틋한 심정이었다.
아직은 초춘이어서 거개가 나목들이다. 선운사 하면 반드시 회자하는 뒤꼍 동백꽃이 한창이다. 동백을 볼 때마다 늘 애틋한 감정이 있다. 저 꽃은 왜 활짝 피기 전에 떨어지는가. 그래서 떨어진 동백을 보며 서럽다고들 표현하는가.
상사화보다도 동백이 그래서 내게는 더 슬프다.
송창식의 노래 가사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프다.
봄이 끝날 무렵에 꽃잎도 다 지는 그런 슬픔이 있거니와 봄이 오기 전에도 이와 같은 동백꽃의 슬픔이 한차례 지나가곤 한다.
인간사 이별과 슬픔은 필연이니 그렇담 인연도 만들지 말고 애초 만나지 말아야 할지니 그렇게 안 되길 노력하는 것도 큰 고통이요 번뇌 아닌가. 그것 참.
선운사 동구(洞口)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서정주
송창식 작사 작곡 송창식 노래 :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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