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방

나는 개다

설리숲 2012. 10. 30. 22:09

 

 고요한 산골짜기에 요란하게 개들이 짖어댄다. 시골 민가들은 집집이 개가 있으니 그 소리 듣는 건 일상이다. 오늘은 그 소리가 여느 때와는 다르다. 뭔가 특별한 상황이 있는가 짐작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통스럽게 자지러지는 파열음과 더불어 개들은 기승스럽게 목을 파며 짖어댄다. 한 생명의 공포에 질린 비명. 어느 집에선가 개를 한 마리 잡는 모양이다. 어릴 때의 경험상 개 잡는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니 경험이 아니라도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는 처참한 상황은 절로 숨을 멎게 한다. 세상을 찢어발기는 듯한 비명은 잠시 뒤 멈췄다. 개들은 여전히 요란하게 짖어 댄다. 눈이 아프다. 저녁 한 끼는 못 먹을 것 같다.

 

 개들은 어이해서 주인을 위시한 인간에게 보복을 하지 않는가. 동료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걸 눈앞에 보며 공포에 질렸으면서 왜

 그것으로 끝나는가. 결국은 자신들 모두에게 돌아올 비극인데 말이다. 생각이 있다면 그 날카로운 이빨로 주인을 물어 죽이거나 최소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게까진 아니더라도 잠재적 원수의 집을 나가 독자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최소한의 반항의 의미로 시위라도 하거나 주인이 주는 밥을 거부할 수도 있단 말이다.

 개 같은 종자들아 너거들은 배알도 없고 치가 떨리지 않느냐. 무에 그리 좋다고 곧이어 저녁에 무지막지한 주인이 주는 개밥을 게걸스럽게도 처먹고들 있는 게냐.

 어느 때 촌락의 한 민가에서 닭을 잡는 걸 본 적이 있다. 크지 않은 닭장에 꽤 여러 마리가 들어 있는데 주인이 문을 열고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놈을 끌어냈다. 닭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러대는데 다른 닭들은 반응이 없다. 주인이 손을 넣어 그 놈을 잡을 때 무슨 일인가 싶어 꼬꼬댁 소리를 질러대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동료가 끓는 물에 들어갔다가 곧이어 털이 뽑히는 걸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들에게도 닥칠 운명을 저들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개의치 않는 걸까. 전자건 후자건 그것들은 역시 닭대가리였다. 조금만 생각이 있다면 주인에게 보복 내지는 응징의 표현을 했어야 한다. 그 알량한 먹이에 얼과 혼을 다 빼고 그저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는 불쌍한 중생들이다.

 그래 느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개새끼요 닭대가리다. 사람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종자들이다.

 

 이튿날 읍에 나가려고 골짜기를 내려가는데 염씨네 앞에 다다르니 흰 개가 한 마리 밭둑에 멍하니 서서 쳐다본다. 여느 때 같으면 인사치레로 짖어대던 놈이다. 그러고 보니 한 마리뿐이다. 지난봄에 어디서 그랬는지 다리를 하나 잘리고 절뚝거리던 놈이 있었는데 내가 지나갈 때면 두 마리가 같이 짖어대곤 하더니 그 놈이 어제 비명에 간 모양이다. 아하 그래서 살아남은 저 놈도 히마리가 없이 그리 비실대는 것이었다. 그렇기도 하겠다. 그 처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긴 했던 모양이다. 아마 충격의 후유증이 있으리라. 그래도 싸다 이 빙충맞은 개새끼들. 너거들은 그저 노예일 뿐이다.

  나는 내가 왜 분노가 이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 멍충이 같은 개새끼들을 흠씬 패주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솟아오른다. 사람들의 잔학보다는 그들을 향해 살랑살랑 꼬리 흔들어대는 저들의 노예근성이 역겨운 것이다.

 

 그날 밤 읍에서 사온 소주를 두 잔 마셨더니 여느 날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깨고는 영 개잠에 들지 못했다. 주섬주섬 일어나 무슨 목적도 없이 문을 나섰다. 염씨네 앞에 이르니 집안에 불은 다 꺼져 깜깜한데 낮에 본 흰 개가 있을 개집에 희미하게 불빛이 있다. 호기심이 일어 살그머니 다가가 들여다보니 개는 없고 빈 집이다. 개집 안에 웬 불빛일까. 빈 개집에 노트가 하나 있다. 그것을 꺼내 펼쳤다. 괴발개발 글씨체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이 집 손녀의 일기장이라도 되나. 손녀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나 이놈의 개새끼가 남의 노트를 제 집에다 물어다 놓았구나.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에 비추어 가며 괴발개발인 그것을 조합해가며 읽었다.

 

 

 

 나는 개다.

 분노는 알지만 분노할 수 없고 슬프나 슬퍼할 수 없는 영락없는 개다. 개새끼다. 어제 함께 지내던 놈이 죽었다. 나는 지난봄에 네 남매로 세상에 나왔다. 정말 세상은 보석처럼 찬란한 곳이었다. 다른 남매와 더불어 우리는 정말로 꿈같이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을 지냈다. 인간들의 말에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있듯이 참말 꿈같이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어느 날 나보다 먼저 나온 강아지가 안 보였다. 엄마는 다른 어느 집으로 팔려 갔다고, 우리 개들의 일생엔 늘상 있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해주었지만 왠지 엄마의 눈에 쓸쓸한 기운이 보였다. 나도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며칠 상관에 내 남매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우리는 달랑 둘만 남았다.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나는 엄마도 잃는 슬픔을 겪었다. 우리 엄마는 대단한 예지능력이 있었다. 어느 날 엄마는 슬픈 표정을 하고 내가 앞으로 혼자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었다.

 나 홀로 남은 집에 새로 강아지 하나가 들어왔다. 아마 놈도 다른 집에서 팔려왔을 것이다. 놈은 나보다 세상경험을 많이 한 놈이라 아는 것도 많고 뭐든지 자신 있어 했다. 잘난 체 하는 게 약간은 꼴 보기 싫었지만 어쨌든 나보다는 잘 난 놈이니까 나는 놈을 믿고 따르며 엄마와 남매를 잃은 슬픔을 금방 잊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놈이 해준 영웅담에 나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오래 전에 한 위대한 개가 있었는데 주인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드디어 집을 뛰쳐나가 야생의 삶을 살면서 자유의 진리를 터득하고 보여 주며 신화처럼 살다간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 얼마나 가슴 벅찬 무용담이던가. 개에게도 그런 위대한 기상과 철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얼마나 감격했던가. 그런 무용담을 이야기하면서 놈의 눈에도 불길이 이는 것을 보았다. 기필코 자기도 그 영웅처럼 멋지게 살겠다는 거였다. 개들에게도 분노는 있다. 정의롭지 못한 학대를 불구하고 인간에게 빌붙어 꼬리를 치는 굴종은 못 견딜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너무도 대견하고 미더웠다. 나는 암놈이다. 원한다면 그와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고 더불어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어느 무덥던 날에 낯선 수캐 한 마리의 방문을 받고 느닷없이 그의 씨를 받고 말았다. 낯설다고 했지만 실은 가끔 보던 개였다. 수민이네 집에 있는 놈인데 그 집에 와 살기까지 많은 집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물정에 대해선 내가 좋아하는 우리 집 그 개보다 더 많이 알았다. 성질이 온순하고 매사에 신중한 개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호감은 있지만 전혀 애정은 없던 그 개와 단 한 번의 거사를 치르고 씨를 받고 보니 애정이 무한정 솟는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 주인은 나를 묶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수민이네 집에 가서 그와 놀고 오는 기회를 만들곤 했다.

 그는 실리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비관론자이기도 했다. 개는 개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로서 억울하고 분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지만 조금만 분기를 억누르면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그까짓 자존심은 하등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또다른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개를 빗대어 그가 말한 것은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개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관리하에 있어 왔다. 그들이 주는 밥을 먹고 그들이 베푸는 동정심에 감읍하며 평생 그들에게 충복이 되는 삶이 개들의 삶이다. 물론 생사여탈도 그들에 의해 정해졌고 일부는 비참하게 죽어 갔고 그로 인해 다른 개들은 평안한 삶을 영위한다.

 어느 대갓집이 가세가 기울어 패가망신하고 허물어져 가자 그간 배부르고 등 따숩게 지내던 그 집의 개들이 당장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집은 인적이 끊어지고 배를 곯다 못한 개들은 할 수 없이 집을 나가 산기슭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주워먹으며 연명을 했다. 그러다보니 성정은 사나와졌고 더 이상 인간 언저리에선 살 수가 없어졌다. 배를 곯다 가끔은 동물의 죽은 시체를 뜯어먹기도 하는데 그 맛에 길들여지자 그예 인간의 시체도 불사하고 먹게 되었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시체의 맛은 다 비슷했다. 그런데도 특별히 잘난 줄 알고 설쳐대는 인간들의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야생이 된 개들은 더 이상 개가 아니다. 맹수다. 사람고기의 맛을 본 맹수는 외지고 한갓진 곳에 사람이 지나가면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역병이 돌아 인간사회가 수없이 무너져 가던 어느 시절에 이렇게 해서 많은 야생 개들이 넘쳐 났고 마을 근처를 배회하던 개들은 인간만 보면 영락없이 달려들었다. 인간들은 미친개들은 죽여야 한다며 거품을 물었고 한동안 개와 인간의 피의 전쟁이 지속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인간과 사람 공히 많이도 죽었다.

 우리 새끼들의 애비인 그는 그러므로 의미도 없는 적대감은 버리고 인간과 더불어 사는 게 진리라고 역설했다. 인간의 집에서 나가면 억척스럽게 먹을 걸 구해야 하고 그러다가 사람의 피와 고기맛을 알게 되고 잔혹한 살육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증오하는 인간의 행태랑 다를 게 없지 않느냐. 그러느니 일말의 자존심만 버리고 꼬리만 흔들어 준다면 그 잘난 인간의 동정심으로 우리 개들은 일생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예전 인간 사회에도 존비가 있어서 부리는 자들이 있고 당하는 자들로 나눠 살았다고 한다. 소위 노비들이 그들로 평생 억압착취만 당하다가 끝내는 것이 그들의 인생이었다. 어느 때 부리는 축 중에 한 깬 자가 있어서 노비제도의 폐해를 타파하자고 그 선례로 자신들의 노비문서를 태워 다 석방했다. 그러나 해방된 노비들이 다시 몰려와 옛 주인에게 시위를 했다. 도대체 자기들더러 어디 가서 뭘 해먹고 살라 하느냐고. 굶어죽지 않으려면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해하거나 온갖 패악질을 일삼아야 한다고. 그러니 자기들을 해방시키지 말고 종으로 부려 달라고. 그들은 해방돼서 굶어죽는 것 보다 비록 뼈 으스러지는 노동일지라도 주인이 주는 밥을 먹고 사는 게 절박했던 것이다.

 내 새끼들의 애비 되는 그 개는 정말 지각 있는 선각자임이 분명했다. 나는 까닭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우리 집의 동료 개는 전설적인 영웅처럼 되고 싶어해 끊임없이 집 밖의 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멧돼지를 잡으려고 놓은 창애에 앞다리를 하나 잘리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온 그에게 우리 주인은 불상타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가 내심 지니고 있는 차가운 반감은 알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만하면 좀 수굿해지련만 그는 반역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늘 바깥으로만 나돌았고 동네 잘 아는 사람만 봐도 그저 물듯이 달려가 짖어대곤 했다. 그에겐 분노와 슬픔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인 것 같았다.

 나는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고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씩 새끼들을 여의었다. 슬프고 분했지만 우리 엄마가 그랬듯이 나는 의연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사랑하는 새끼들이 좀더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랬다.

 

 주인아저씨는 미쳐 있었다. 눈빛이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우리 개들에겐 다분히 예지 능력이 있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미리 감지 할 수 있다. 그날 우리 주인아저씨의 몸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공포가 엄습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줄에 묶여 있으므로 알아도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체념하고 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먹자 공포심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 했다.

 웬일인지는 몰라도 나는 줄로 묶어 두었으면서도 망나니 같은 동료 수캐는 여태껏 개줄 없이 방임해 두었었다. 그래서 동료 수캐는 마음 놓고 인간 밖의 세상을 듣보고 다녔는데 그날 점심때가 가까워오자 주인아저씨가 그의 목에다 줄을 옭아맸다. 아, 나는 장탄식했다. 내가 아니구나. 수캐도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몸을 도사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온몸이 경련했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오줌을 지렸다. 비명도 못 내지르고 끙끙거리기만 했는데 이윽고 주인아저씨가 밤나무 쪽으로 그를 끌고 갔다. 이웃집 남자 서너 명이 합세 했다. 그제야 동료는 무섭게 발광을 하면서 하늘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세상에 그렇게 무서운 소리는 처음이었다. 처참한 광경에 나도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물똥을 갈기며 내 동료 수캐는 그렇게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나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개는 개답게 주인의 알량한 먹이를 받아먹으며 꼬리치고 살아야 평안하다고 우리 새끼들 애비는 그랬지만 나는 그만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참혹한 광경을 본 나의 눈은 좀체로 돌아오질 않았다. 그날 저녁 딴솥에 물이 끓고 자유를 갈망하던 내 동료의 고기가 동네사람들 입으로 골고루 들어가는 것도 죄다 보았다.

 그들이 축제에 빠져 흥분해 있음을 이용해 나는 절체절명의 선택을 했다. 입에 피가 흥건히 괴도록 나는 목줄을 갉아 끊었다. 힘없이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면서 아직도 팔려가지 않고 남은 유일한 혈육을 찾았다. 아무 맹문도 모르는 녀석은 그저 에미가 좋아 쪼르르 달려왔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녀석의 목을 물었다. 깨갱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피가 솟구치며 축 늘어지는 녀석을 옥수수밭 앞에 흐르는 개천에 던져 버렸다.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인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쓰러져 긴 잠에 빠졌다. 나는 이제 곧 떠날 것이다. 나가서 야생의 개가 되든지 누군가에게 잡혀서 보신탕집으로 가든지 또는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든지 할 것이다. 어찌 되든 우리 개들의 선조들이 지나왔던 전철을 밟는 것이 되니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사람들은 평생 인간주인에게 굴종의 삶을 살고 또 참혹한 죽음의 지경을 당하면서도 항거하거나 보복하지 않는 우리들을 빙충이 같은 개새끼들이라 비하하곤 한다. 그리고 근천스러운 노예근성에 역겨워한다.

 우리들이라고 모르는 바 아니다. 인간들이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들이 먼저 인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어쩌겠는가. 야생의 개가 되어 인간을 살육하면서 사는 것보다 그들이 하사하시는 밥을 먹으며 편안하게 사는 게 더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이 슬픈 자괴감. 그게 하늘이 내린 우리의 운명이라고 하면 패배의식에 절은 지나친 자기변명일까.

 

 어쨌든 나는 집을 나간다. 이것이 마지막 일기임에도 비장하지 못 하고 그저 꿈같던 지난 생을 되돌려보는 필름처럼 헙헙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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